대한민국 시작과 울산의 독립만세의거
대한민국 시작과 울산의 독립만세의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2.25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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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은 대한민국 원년의 해이다. 그해 3월 1일에 경성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의 망명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 헌법에서 국호는 ‘대한민국’,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였으며, 대통령제를 도입하였고, 3권 분리제도를 확립하였다.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였으며, 구 황실을 예우한다고 명시하였다. 동년 9월 11일에는 각지의 임시정부들을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등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지원하였고, 중국 국민당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지원을 받았다.

대한민국은 이미 그 이전부터 태동하기 시작했다. 석주 이상용 가문과 우당 이회영 가문 등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만주로, 연해주로 떠났다. 국내에서는 1915년에 조직된 무장 독립투쟁 단체인 광복회가 활동했는데, 안타깝게도 3년 만에 총사령 박상진이 체포되었다. 불세출의 지사 박상진은 감옥에서 3·1독립만세 의거와 김좌진의 청산리대첩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1919년 2월 8일, 마침내 조선 유학생들이 식민 통치의 심장인 도쿄에서 600여명이 모여 조선 독립을 선언했다. 이를 <2·8 독립선언>이라고 하는데,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보다 먼저 <무오 독립선언>이 있었다. 기미년 벽두에 만주 길림에서 만주와 연해주,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 39명의 명의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던 것이다. 이날이 음력으로 1919년 1월 1일이었는데, <기미 독립선언>과 구별하기 위해 선언서 작성이 기미년 앞의 해인 무오년에 이루어졌음을 고려하여 <무오 독립선언>으로 불린다. 신채호를 비롯한 기라성 같은 지사들이 참여하고, 조소앙이 기초한 이 선언서에는 사기와 강박에 의한 일본과의 병합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 등을 담았다.

이 두 가지 독립선언의 영향으로 민족대표 33인의 <기미 독립선언>과 함께 3·1만세 의거가 시작되었다. 대한 사람들의 독립의지가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결집시킨 것이다. 3월 3일은 그해 1월 21일에 붕어한 고종 황제의 인산(국장)일이어서 만세 의거의 기폭제가 되었다. 곧이어 조선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고, 4월 1일에 유관순이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만세 의거를 지휘하다 체포되었다. 이어지는 만세 의거와 유림들의 파리장서운동으로 수많은 희생자들이 속출했다. 울산에서도 언양, 병영, 남창 등지에서 독립만세 의거가 일어났다.

언양에서는 4월 2일 장날에 만세 의거가 일어났다. 천도교 언양교구장 김교경이 서울의 3·1만세 의거를 목격하고, 독립선언문과 국민회보에 게재된 기사를 울산교구로 보내왔다. 이규장은 거사 지시를 받고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언양으로 돌아왔다. 이에 최해규, 곽해진, 이규천, 유철순, 이규로, 이무종 등 7인이 모여 중진회의를 열었고, 이 회합에서 언양 독립 만세운동의 거사를 결의하였다. 이들은 대개 일찍이 천도교를 받아들인 상북면 사람들이었는데, 이날의 거사로 수형한 주도자는 26명이었다.

4월 4일과 5일, 양일의 병영 만세 의거는 병영청년회가 주도했다. 서울에서 유학했던 한명조, 이영호가 병영청년회에 3·1만세운동 소식을 전했다. 양석룡, 이현우, 이종욱, 이종근, 이문조, 김장수, 박영하 등 사립 일신학교 졸업생들이 청년회의 간부였는데, 병영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4월 4일 오전 9시에 일신학교 운동장에서 차올려진 축구공을 신호로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4월 5일 2차 시위 때는 경찰의 무력 탄압으로 김응룡, 문성호, 엄준, 주사문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지만 상무의 고장다운 기개를 보여주었다.

4월 8일의 남창 장날 의거 기획은 신밤(신경리)의 학성이씨 문중 사람들이었다. 고종 인산에 참배하러 갔다가 귀향한 웅촌 석천리의 이재락은 신밤에서 찾아온 이수일에게 서울에서 목격한 만세 의거를 전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보여주었다. 이를 정독한 이수일은 집으로 돌아와 문중 원로들과 의논한 결과 문중 청년들에게 만세 의거에 나서기를 권하는 통고문을 작성하여 회람시켰다. 드디어 4월 8일 남창 장날에 이용락 등 주동인사들은 장꾼들이 모이자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다.

이처럼 3·1독립만세 의거는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그 후 유림단과 여운형의 노력으로 김규식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난립했던 임시정부들이 상해로 통합되었다. 만주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의열단이 결성되는 등 대일 투쟁도 끊이지 않았다. 임시정부 청사도 상해에서 항주, 남경, 광주, 중경 등 10여 곳을 옮겨 다녀야만 했다. 이처럼 모진 격랑기에도 조국을 향한 대서사는 가멸차고 끈질겼다. 긴 세월 지나 대한민국 출발 100년을 맞은 지금, 남북통일에 앞서 평화공존이 겨레의 소명일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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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 수필가 울산학포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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