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닫은 동광탕’ 건물과 굴뚝은 아직 그대로…
‘문 닫은 동광탕’ 건물과 굴뚝은 아직 그대로…
  • 김보은
  • 승인 2019.02.24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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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목욕탕 ③ 중구의 옥천탕과 동광탕
1993년 3월 폐업했으나 건물과 굴뚝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동광탕.
1993년 3월 폐업했으나 건물과 굴뚝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동광탕.

 

 

◇1963년 6월 중구 옥교동에 ‘옥천탕’ 문 열어

보기드문 3층 건물·목욕 중 일본식 정원 감상

해방 이후 울산시 중구에는 옥천탕과 동광탕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유성렬씨는 중구 옥교동에 옥천탕을 세웠다. 영업신고는 1963년 6월로 돼 있다. 유씨가 목욕탕을 세운 곳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미시다니(西谷)가 살았던 집터였다. 미시다니는 일제강점기 울산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는데 유씨는 미시다니 아래서 사진 기술을 배웠다. 미시다니는 해방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목욕탕 건물은 3층으로 당시 울산에서 보기 힘든 높은 건물이었다. 건물 전체에는 보일러를 설치해 겨울에도 각층의 사용자들이 따뜻하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층에는 공중목욕탕 외에도 요즘으로 말하면 가족탕처럼 2~3명의 사람들이 함께 목욕할 수 있는 탕도 3~4개를 뒀다. 2층에는 유미다방과 유씨의 개인 사랑방이 있었고 3층에는 10여개의 원룸 형태의 방과 화랑을 둬 빌딩 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화랑은 당시 울산여고 미술 선생이었던 김홍명씨가 사용했는데 김씨는 1968년 건물 내에 있었던 유미다방에서 작품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옥천탕이 문을 열 때만 해도 우리나라 목욕문화는 일본식을 벗어나지 못해 탕 내에서 사용하는 바가지는 대나무 태를 두른 나무바가지였다. 남녀 탕 사이에는 목욕 후 맑은 물로 몸을 씻는 탕이 따로 있었다. 또 미시다니가 남겨두고 간 아름다운 정원을 탕 내에서 볼 수 있도록 지어 목욕탕에서 보는 정원의 경치가 좋았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 목욕탕은 폐타이어를 연료로 사용할 때가 잦아 목욕탕 인근 사람들이 악취로 불평을 터뜨릴 때가 많았다. 옥천탕이 문을 닫은 때는 1991년으로 폐업 이유는 ‘허가취소’다.

◇동광탕, 1964년 6월 13일 학산동에 들어서

배 밭 판 돈으로 울산탕 매입하려다 새로 지어

옥천탕 다음으로 들어선 목욕탕이 동광탕이다. 동광탕이 영업을 신고한 날짜는 1964년 6월 13일이고 장소는 학산동이었다.

동광탕은 심완구 전 시장의 부친 심종근씨가 당시 대현면 배 밭을 판 돈으로 건립했다. 심 어른은 당초 배밭을 판돈으로 울산탕을 사려고 했으나 울산탕이 너무 비싼 가격을 제시하는 바람에 이곳에 새 목욕탕을 지었다.

심씨가 동광탕을 건립해 손님들을 받을 때만 해도 아들 심완구씨는 서울에서 어려운 야당생활을 하고 있었다. 심씨는 1972년 유신이 발생했을 때 울산에서 유신반대운동을 벌이다 서울로 피신한 동료들을 숨겨준 것이 문제가 돼 부산 보안사까지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석방이 된다. 이때 보안사를 나온 후 서울로 가기 위해 차비를 얻으려고 온 곳이 그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동광탕이었다.

동광탕이 폐업을 한 것이 1993년 3월로 이때 심씨는 14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한국전력 고문으로 있었다. 동광탕은 문을 닫은 지가 오래됐지만 아직 목욕탕 건물과 굴뚝은 그대로 있다. 글·사진=울산시문화원연합회 ‘울산의 목욕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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