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놀이-‘웨이크필드’
일상의 놀이-‘웨이크필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2.07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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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필드>는 결혼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인 하워드 웨이크필드(브라이언 크랜스톤)에겐 아름다운 아내 다이애나(제니퍼 가너)가 있다. 영화가 시작되고 잠시 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아내와 가끔 싸웠지만 그건 질투심을 이용한 성적 유희 같았다. 아내와 난 암묵적으로 그걸 이용한 거다. 결혼 15년차에 들어서니 질투심은 꽤 자극제가 됐다. 솔직히 배우자가 질투를 느끼면 좋은 거다. 아직 피가 뜨겁고 심장이 요동치는 거니까. 우린 싸우고 나서 늘 섹스를 했다.”

화면상에서 이 독백은 아내인 다이애나가 이웃 남자와 즐겁게 수다를 떠는 모습을 하워드가 야릇한 표정으로 몰래 훔쳐보면서 나온다. 그랬거나 말거나 <웨이크필드>에서 이 독백은 이후 펼쳐질 하워드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있어 꽤 중요하다.

사실 하워드는 부족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잘 나가는 변호사였고, 아름다운 아내와 두 딸이 있었다. 그런 어느 날 통근 기차를 타고 귀가하다 정전이 일어났고, 걸어서 집으로 가다가 집을 배회하는 너구리가 2층 창고 건물로 들어가자 쫓아내기 위해 따라 올라가게 된다. 2층에는 큰 창이 하나 있었는데 그 곳에선 집안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마침 아내와 두 딸이 식사 중이었는데 아내는 아직 귀가하지 않은 하워드를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그 때 아내에게서 막 전화가 왔지만 하워드는 받지 않는다. 하워드는 좀 전 정전이 났을 때도 받지 않았다. 그 때는 사람들이 많은 기차 안이라서 안 받았지만 지금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받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때부터 몰래 집안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게 재밌었던 하워드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창고에 머무른다. 출근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실종신고로 경찰까지 찾아오지만 그는 귀가를 거부했고, 그러다 그곳에서 몇 개월을 숨어서 보내게 된다.

솔직히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하워드의 심정만큼은 앞서 먼저 제시했던 그의 독백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하워드는 지금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일상에 지쳐 있다. 그에겐 자극이 필요했고, 보통의 남편들이라면 몰래 바람을 피곤하겠지만 그는 가족들에게서 사라지는 일탈을 감행하게 된다. 외도와 실종, 둘 다 고의성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어느 게 더 나쁜 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아무튼 하워드는 관객들을 향해 이렇게 변명한다.

“결혼과 가족이 종교라도 된 단 말인가?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도 거기 묶여 살아야 할까? 누구나 그런 충동을 느낀다. 잠시 이 삶을 정지시키고 싶은 거다. 당신도 이런 일탈을 꿈꿔 본 적 있지 않나?” 당연히 있겠지. 인간인데. 아무튼 그는 이런 말도 보탠다. “집에서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을 거다. 해방이다. 하워드 웨이크필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아까 하워드의 실종을 외도와 비교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비교할 게 못 된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고, 그의 모습은 점점 거지꼴이 되어 갔지만 일상에서 탈출한 그는 혼자만의 삶을 살면서 가족들을 몰래 지켜보다 세상과 인생에 대해 하나씩 깨달음을 얻어간다. 그 깨달음의 끝은 하워드의 입을 통해 마침내 이런 대사로 표현된다. “모든 게 선명하게 보여. 다 내 탓이었구나. 질투심, 분노심, 급한 성질, 이기심. 하워드는 희생자인 척 모든 걸 판단했다. 늘 나만 옳다고 생각했다. 바로 거기가 내 감옥이었고, 난 그곳에서 탈출한 거다.”

우리들 삶에도 고도(높이)란 게 있다. 저 높은 곳에 떠 있어 쉽게 닿을 수 없는 게 행복이라면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지상은 평범한 일상이 되겠다. 그런데 일상은 너무 자주 접하다 보니 쉽게 질려버리고 만다. 갑자기 생긴 싱크홀에 빠져 지하 깊숙한 곳으로 추락하거나 불의의 사고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됐을 때면 평범한 지상이 사실은 행복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지루해도 아무 일 없는 일상에 대한 고마움을 비로소 알게 된다.

잘 나가던 변호사에서 고도를 한껏 낮춰 노숙자가 된 뒤 얻게 된 하워드의 깨달음도 사실은 일상이 주는 고마움이 아니겠는가.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해지자 그는 교만해졌고, 일탈로 시작된 고행을 통해 교만의 원인을 깨닫게 됐던 거다.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 좀 더 즐거운 무언가를 찾기 위해 늘 고개를 쳐든 채 허공만을 바라보다보니 주변은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2층 창고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비로소 자신은 이미 행복한 사람이었고, 굳이 질투심을 이용하지 않아도 아내는 이미 아름다운 사람이었단 걸 깨닫게 됐다. 삶이란 게 그런 거 같다. 시선을 낮출수록 행복은 더 가까워진다는. 그래서 행복은 기다리거나 이루는 게 아니라 그냥 눈을 크게 뜨고 찾는 게 아닐까.

2018년 1월25일 개봉. 러닝타임 109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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