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암리 독립운동의 중심, 문암 손후익
입암리 독립운동의 중심, 문암 손후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2.07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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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봄에 한 선비 일가가 범서 입암리로 이사를 왔다. 그들은 형산강 중류의 경주 오금리 금호에 살던 38세의 문암 손후익(孫厚翼, 1888-1953)이 가장으로, 위로는 아버지 강재 손진수(1869-1935)와 아래로는 아내와 동생, 자녀 등 십여 명 내외로 보인다. 회당 장석영 문인인 가산 이우락(1881-1951)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입암리로 들어왔지 않나 싶다. 문암도 가산과 같이 회당의 문인이었고, 문암의 종매(숙부 손진염의 딸)가 가산의 며느리가 된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학맥이 한주학파로서 그 친밀도를 짐작할 수 있다.

문암은 오금리가 싫어서 떠났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강재의 행장기에는 일제의 감시망이 날로 심해지고, 염탐꾼이 너무나 은밀하여 입암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문암의 조부인 직량재 손최수(1851-1918)는 을미(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항거하여 경주의병대장이 되어 일본에 맞섰던 인물이다. 거기다가 을사조약(1905) 이후 중부인 호봉 손진형(1871-1919)은 전국을 돌며 국권회복에 앞장섰고, 그 후로 중부의 이어지는 독립운동과 상해에서의 사망으로 조선총독부의 눈엣가시로 찍히자 이를 피해 입암리로 이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으로 이사한 후 강재와 문암은 산수에서 소요하리라 마음먹었다. 강재는 동생인 호봉의 독립운동을 늘 성원해 왔다. 동생이 3.1만세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 요인으로 손문(1866-1925)과의 접촉을 앞두고 콜레라로 병사하자 상해로 건너가 박은식, 이동휘 등과 계책을 논의하고 은밀하게 귀국했다. 문암도 3.1만세운동과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했으며, 오랜 기간 중부의 독립활동을 뒷바라지했다. 그러나 양 부자는 이제 안신입명(安身立命)하기보다는 세상 일 다 접고 구전문사(求田問舍)하리라 다짐했다.

이 무렵에 손후익은 자호를 문암(文巖)이라 정했다. 문수산이 북동쪽으로 뻗은 자락에 태화강물이 무학산 앞을 휘돌면서 만든 강가의 선바위 모습을 보고 지은 것이다. 이 무렵에 강재는 남파 이수일(1871-1931)과 사돈 관계가 된다. 남파는 남창 3.1만세운동의 기획자로서, 그의 아들 이정걸(1905-1981)을 문암의 여동생과 결혼시키기에 이른다. 결혼 시기가 손씨 일가의 이주 전인지 후인지는 불확실하나 울산과의 인연은 깊어지고 있었다. 필자는 1973년 초에 이휴정가 종부였던 손씨 할머니를 처음 뵈었을 때의 기품 있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런데 세상은 문암을 그냥 두지 않았다. 군자금 모금을 위해 상해에서 귀국하여 활동하던 심산 김창숙(1879-1962)이 언양에서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자 문암은 심산을 입암으로 모시고 왔다. 손후익 부자의 극진한 간호로 호전되자 양산과 동래, 울산지역에서 모금활동이 이어졌는데, 두 부자는 물론 이우락, 이재락, 문암의 처남 정수기가 적극 참여했다. 1926년 3월에 범어사에서 있었던 모임에서 군자금 모금액이 목표에 미달하자 비협조자들을 처단키로 결정했으나 이들은 모두 피체되었고, 손후익 부자도 대구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입암리에는 또 다른 독립운동가가 성장하고 있었다. 문암의 막내 동생인 손학익(1908-1983)은 항일 격문을 살포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맹렬하게 하다가 복역 중 광복을 맞았다. 문암의 차녀 손응교(1918-2016)는 심산의 며느리가 되어 시아버지와 남편 김찬기(1915-1945) 부자의 독립운동을 도왔고, 옥고를 뒷바라지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던 문암과 이관술(1902-1950)의 딸들은 서로 이웃하며 자랐다. 중동학교와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한 가산의 족질 이관술이 독립운동가가 된 것은 문암 집안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문암 손후익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데 근래에 경주시가 발간한《경주향현록》을 열람하면서 크게 바뀌었다. 문암의 행적을 무려 17쪽에 걸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인 강재와 중부인 호봉의 기록도 상당했다. 이 손씨 일가는 경주 양동 낙선당 손중로의 후손들이다. 문암은 회당 장석영과 면우 곽종석의 문인이고, 심산 김창숙과도 종유했으니 모두 파리장서운동의 핵심인물들이다. 거유였던 한주 이진상의 주리철학을 심학의 정통으로 수용한 유학자였고, 명필에다 대문장가인 문암의 문집 22권이 전한다.

손후익 일가는 4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아버지 손진수는 건국포장을, 숙부 손진형과 손후익, 손학익 형제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사돈인 심산은 대한민국장, 가산은 건국포장, 사위 김찬기는 애족장을 받았다. 처남 정수기(1896-1936)는 애국장, 독립군자금에 쾌척했던 심산의 사돈 이재락(1886-1960)은 애족장을 수훈했다. 조부 손최수와 딸 손응교도 마땅히 의병활동 또는 독립운동 유공자가 되어야 한다. 범서 입암리는 문암을 비롯한 1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딛고 다니던 땅이었으나 아무 흔적도 없으니 아쉽기 그지없다.

<이정호 수필가·울산학포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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