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할머니
시 읽는 할머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1.31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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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단상> 시 읽는 할머니

천애란 (재능시낭송협회 울산지회장)

하늘나라 봄은요 벌써 왔나요
송이송이 흰 꽃이 떨어집니다
마른 낭계 내리면 매화꽃 되고
솔잎 위에 내리면 함박꽃 되고
하루 종일 내려도 하얀 꽃송이 -중략-

내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자주 들려주던 서정봉 시인의 ‘눈’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감성이 풍부한 엄마 덕분에 사춘기가 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애송시 한 편을 써서 보냈고, 마음에 와 닿는 시를 만나면 예쁜 공책에 필사를 하기도 했다.

작년 가을, 나의 일곱 번째 동시낭송 콘서트를 준비하던 중 엄마에게 출연을 요청했다. “엄마, 나 어렸을 때 자주 들려줬던 그 시, 이번 콘서트 날 엄마가 무대에 서서 낭송 해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늙은이가 무대에 서면 보기 싫다.”라고 거절했다. 하지만 엄마가 낭송을 해야 되는 이유를 설명했고,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낭송하기로 약속을 했다.

드디어 동시낭송 콘서트 날이 되었다. 51년 전 시집오던 날보다 더 떨린다던 엄마는, 신기하게도 무대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제스처까지 하면서 여유 있게 낭송을 했다. 많은 박수와 함께 앙코르까지 받은 엄마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날 낭송했던 동영상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면서 은근슬쩍 자랑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가슴 한편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그런데 생애 처음 무대 위에서 시낭송을 하고 행복해 하던 엄마에게 큰 시련이 왔다. 임플란트 시술 후 부작용으로 밤중에 갑자기 이가 붓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기도가 막힐 정도로 심하게 부어서 응급실로 갔다. 입원해서 일주일 동안 치료를 했지만, 결국 대학병원에서 수술까지 하게 되었다. 오래 전에 이미 두 번의 수술을 했던 탓에 엄마는 다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해야 된다는 것에 큰 부담을 느꼈다. 그리고 당신이 ‘살아서 다시 가족들을 볼 수 있을까’하고 불안해했다.

수술은 2시간 넘게 진행되었다. 내게 그 시간은 2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다. 하지만 마취에서 깨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엄마는 겨울잠이라도 자는 듯 자꾸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때 문득 엄마가 시낭송 했던 동영상이 생각났다. 난 엄마 귀 가까이에 휴대폰을 대고는 엄마가 낭송했던 시를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엄마, 시낭송 하는 것 들려요?” 엄마는 들린다는 뜻으로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2시간 쯤 지났을 때 긴 잠에서 무사히 깨어날 수 있었다. 마취가 풀리자 살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을 참아야 했다. 나는 무언가에 집중하면 덜 아플 거라고 하면서 엄마 곁에서 계속 시를 들려주었다. 엄마는 내가 들려준 시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서 외우기로 했다. 그리고 통증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마다 엄마는 시를 읽었다. 며칠이 지나자 병실과 간호사실에 ‘시 읽는 할머니’라는 예쁜 소문이 매화 꽃망울 터지듯 퍼졌다. 시를 외울 때 엄마한테선 연보라색 칡꽃 향기가 났다.

그 때 엄마가 외우던 시는 유자효 시인의 ‘꽃길’이었다.

당신을 만난 것에 감사합니다
함께 해온 시간들에 감사합니다
당신을 만남으로서 탄생한 생명들에 감사합니다
당신이 곁에 있어서 나의 눈이 트였고
세상이 보였습니다 -중략-

그렇다.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마음을 치유해주고, 안정시켜주는 ‘최고의 마음보약’ 시가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엄마는 심심할 때면 내가 필사해준 시를 읽고, 녹음해준 시를 들으면서 암송한다. 시를 품을 줄 아는 가슴 따뜻한 엄마 딸로 태어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다. 올해 74세 ‘시 읽는 할머니’ 엄마의 두 번째 시낭송 무대가 언제일지 모르나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천애란 재능시낭송 협회울산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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