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이 화이트보다 위대한 이유 -‘그린 북’
그린이 화이트보다 위대한 이유 -‘그린 북’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1.24 23: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린 북>에서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허풍과 주먹만 믿고 살아가는 그저 그런 인생이었다. 직장으로 다니던 고급 술집이 리모델링에 들어가면서 몇 달 동안 쉬어야만 했던 토니는 가족들 부양을 고민하게 됐고, 그런 그에게 색다른 일자리 하나가 제안된다.

바로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박사의 남부 투어 공연에서 운전기사를 맡아달라는 것. 시절은 바야흐로 1962년의 미국이었고, 돈 셜리 박사는 흑인이었다. 반면 토니는 백인이었다. 그러니까 아직도 인종차별이 만연해있던 그 시절의 미국에서 흑인 피아니스트가 흑인노예제도의 성지였던 남부로 투어를 나서게 되는데 그 운전기사는 백인이었던 거다.

그런 그들 손에는 ‘그린 북’이 한 권 주어져 있었다. ‘그린 북’이란 그 시절 흑인들을 위한 전용 여행 가이드북이다. 당시만 해도 흑인들은 아무 데서나 편하게 숙박이나 식사를 할 수 없었고, 그린 북에는 바로 그런 흑인들이 이용 가능한 숙박업소나 레스토랑, 주유소 등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린 북의 색깔은 이름처럼 초록, 그러니까 그린(Green)이었다. 참. 토니와 셜리를 함께 태운 차도 초록이었다. 참고로 이 영화는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사실 색깔(Color)에도 철학이란 게 있다. 태초부터 빛과 어둠이 있었으니 빛이 화이트라면 어둠은 블랙이다. 이 때부터다. 우리 인간들이 화이트에 집착하기 시작한 건. 검은색의 어둠은 두려움 그 자체였고, 해서 언제부턴가 우리 인간들은 빛을 구원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기가 없었던 그 시절,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는 밤이 되면 세상은 더욱 위험해졌고, 새벽녘 동쪽에서부터 밝아오기 시작하는 빛은 위대한 존재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어둠이 악마라면 빛은 천사였다. 블랙은 악(惡)이고, 화이트는 선(善)이었던 것. 이게 바로 그 동안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멸시를 받았던 철학적인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46억년 전, 대세인 화이트와 블랙에 가끔 별의 폭발로 레드가 뿜뿜했던 이 우주 공간에 놀라운 일이 하나 벌어진다. 바로 지구라는 행성이 생겨난 것. 지구는 색깔이 이상했다. 대부분의 행성이 검은 황토색이었는데 지구는 그린이었던 것. 우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색이었다. 그렇잖나. 이 넓은 우주 공간에서 누가 인위적으로 색칠을 하지 않는 이상 초록은 지구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그린의 철학적 의미는 ‘생명탄생’이었던 거다.

철학공부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영화로 다시 돌아가자. 사실 <그린 북>은 이렇듯 색감으로 읽으면 좀 더 의미 있게 볼 수가 있다. 우연찮게 화이트(토니)와 블랙(셜리)이 같은 공간에 있게 됐다.

세상은 여전히 전자를 선으로, 후자는 악으로 치부했으니 둘은 당연히 초반부터 삐걱댈 수밖에 없었다. 토니와 셜리는 처음에는 서로를 싫어했다. 허나 그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토니는 돈 많은 셜리에게 고용된 사람이었고, 백인답지 않게 토니는 단순한 사람이었기 때문. 진짜 큰 문제는 차창 밖의 세상이었다. 여전히 화이트에 집착했던 세상은 블랙의 셜리에게 온갖 멸시를 가했다.

그런 그들을 나름 안전하게 안내했던 건 다름 아닌 작은 그린 북. 그렇게 그린 북은 그린 색의 차와 함께 화이트와 블랙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니 초록 안에서 웃고 떠들다보니 흑과 백은 마침내 친구가 된다. 둘 사이엔 ‘우정’이라는 새 생명이 생겨난 것. 그건 그린이 만들어낸 마법이었다. 마치 초록의 지구 같다. 바로 그린이 화이트보다 위대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왜 천사의 옷은 꼭 화이트여야 할까? 피곤하게시리. 솔직히 몸이 많이 피곤할 때는 블랙이 더 좋다. 숙면이 가능하니까. 아니 그 보다 우주공간에서 빛과 어둠, 그러니까 화이트와 블랙은 과연 서로 싸우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 혹시 서로를 돋보이게 해주는 좋은 친구 관계는 아닐까. 그렇잖아. 어둠이 있어 빛은 더욱 빛이 나고, 빛이 있기 때문에 어둠은 존재감이 더욱 확실해진다.

<그린 북>에서도 두 달 간의 긴 여정을 마친 화이트의 토니와 블랙의 셜리는 헤어짐을 몹시 아쉬워한다. 2019년 1월9일 개봉. 러닝타임 130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