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25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25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1.2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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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산하 기구에서, 그리고 친선을 맺은 선진국에서 무상원조 또는 차관 형식으로 도움을 주었다. 학교를 지었고, 실습에 필요한 기자재도 어느 정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1950년대 말, 한국 경제사회는 가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해운 또한 살길을 찾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었다. 전쟁을 겪고 국민들과 산업계의 모든 것이 빈곤 상태였지만 그래도 해운 쪽이 나은 편이었다. 한국 해운을 대표하는 대한해운공사에는 외양항해 가능한 화물선이 다수 운항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해운 선사는 화물을 운송하고 그 대가로 받는 운임으로 경영을 하게 되어 있는데 화주들이 대한해운공사를 비롯한 한국 해운 선사를 이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국내 화주들도 마찬가지여서 당시 한국 해운 선사들의 화물적취율은 대단히 낮았다. 그 때문에 한국적 선박들이 부산항 외항에서 닻을 놓고 대책 없이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하여 해운업계에서는 정부 관련 기관에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이렇게 이 시대에 한국 해운은 절치부심, 그렇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1961년 가을, 신태범은 부산항 부둣가에 서서 화물을 가득 싣고 입출항하는 화물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한 선박들은 열 중 여덟 아홉은 외국적 선박이었다. 한국적 선박은 몇 척 안 되는 것이다. 신태범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한해운공사 소속 선장 신태범은 대한조선공사(현재의 한진중공업)에서 군산호의 수리 공정을 감독하고 있었다. 군산호는 1957년에 ICA(미국국제협조기구)의 원조로 도입되었는데 운항 중 풍랑으로 좌초 침몰한 것을 다시 쓰기 위하여 인양해서 대한조선공사에 수리를 맡긴 것이다. 대한조선공사에서 군산호의 수리 공정을 지켜보던 신태범은 조선공사의 기술력이 의외로 상당한 수준임을 깨달았다. 여기서 신태범은 획기적인 발상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도 원양 항해가 가능한 배를 만들 수 있다, 아니 만들어야 한다, 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때는 조선공사의 선박 건조 실적이 100톤 미만 소형선이던 그런 시절이었다. 이것이 한국근현대해운사에 있어서 한국 해운의 발흥에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하는 ‘계획조선’이었다. 신태범으로 시작된 한국해운의 계획조선은 때마침 시작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취지와도 잘 맞아 정부 경제정책으로 수립되어 국적선 선대의 형성에 기틀이 되었다.

‘선급’은 항해선이 출항 전에 당해 해역에서 항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잘 갖추었는가를 검사하는 제도인데 무역의 특성 상 국제성을 지니고 있고 해상보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아직 해운산업의 체계가 형성되기 전이었던 한국 해운에 ‘선급’이 설립되었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으로 평가 받는다.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선급으로 자리 잡은 ‘한국선급’이 있기까지는 일찍이 허동식이라는 해운 선각자가 있었다. 1960년 9월, 그는 마찬가지로 한국 해운의 선각자이며 개척자인 황부길과 박현규의 조언을 들으며 아직 빈약한 한국 해운의 벌판 위에 ‘한국선급’을 세운다. 이후 그는 약 2년 동안 빈손으로 살아야 했다. 일감이 없는 것이다. 그는 일감을 구하기 위하여 해운 선사를 찾아다니며 부탁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당시 해운기업들 중에는 아직 선급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 회사들도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상당수가 한국선급의 기술력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선급이 자리를 잡기까지는 설립자인 허동식과 그 직원들과 그 외 해운인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한국해운의 발흥기에 있었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웨이버제도’였다. 웨이버제도는 이른바 ‘자국화자국선’이라는 보호무역 정책의 일종이다. 이것이 실현되기까지는 해운인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1950년대 말, 전쟁의 혼돈 상황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정리되고 한국해운은 비록 노후선이고 많지 않은 선대이지만 나름대로 해운을 경영할 만큼 역량도 있었고 자신감도 충만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차가웠다. 외국 화주뿐만 아니라 국내 화주조차 한국적 선박을 기피했다. 그 때문에 부산항의 외항에는 닻을 놓고 무작정 기다리는 국적선들이 많았다. 당시에는 한일간의 무역과 해운이 상당 부분 차지했는데 한일간 항로를 오가는 화물운송의 대부분은 일본 선박이 차지했다. 이런 현실을 완전히 역전시킨 것은 웨이버제도였다. 정부 당국은 웨이버제도를 정책화하여 한국 개항항을 출입하는 한국 화물을 실은 화물선은 반드시 국적선을 이용하게 하고 해당 항로에 미취항하는 경우에만 예외로 했다. 이것은 이후 한국해운의 발전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해운은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50년 말 1960년대 초, 한국해운은 주로 일본과 동남아시아 항로를 취항하며 나름대로 세력확장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시에 해운기업은 국책기업인 대한해운공사 외에도 극동해운, 근해상선, 동서해운 등 10여 개 해운기업이 있었지만 실무자들은 해운경영의 중요한 기법인 선박용선이라든지 선박매매와 선박금융 국제 해운시황에도 어두웠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을 탈바꿈하는 계기가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한국 해기인력의 해외취업이었다.

한국 선원들은 1964년 이후부터 해외의 선박에 본격적으로 취업하기 시작했다. 한국 선원이 처음으로 해외취업을 시작한 공식적인 기록은 1960년 6월, 그리스 선박 라밀레프스 호에 김강웅 통신장이 승무한 일이다. 그 때 부산항에 입항한 이 선박의 통신장이 병으로 하선하게 되어 한국인 통신장을 구했는데 대한해운공사의 김강웅이 추천되었다. 그는 이 배에서 2년 6개월을 승선근무하면서 좋은 평을 받았다.

해외취업선에 승선한 한국 선원들은 뛰어난 해기 기술력과 근면함을 함께 갖춘 수준 높은 노동인력이었다. 그들은 고장 난 기계를 고칠 수 있었으며 오래되어 녹슨 갑판을 깍아내고 페인트를 칠하여 새롭게 단장했다. 한국 선원들의 이처럼 뛰어난 해기 능력은 국제 해기 인력시장에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흔치 않는 사례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해운 선진국가의 해운기업 소속 매우 오래되어 폐선 직전의 선박에 한국 선원이 승선하고 있었다. 그들은 항해 중에 이 배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수면 시간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정비작업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모항에 입항이 가까워지자 배는 점점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입항일 날, 부두에서 배의 도착을 기다리던 본사 직원들은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배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배는 제 시간에 진작 도착했지만.

세계 해운의 한국 해기사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에 일본해운이 한국 해기인력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시 일본해운은 자국 선원의 임금이 상승하여 운항비 부담이 크던 시점이었다. 일본해운은 한국 해기인력을 고용하면서 조건을 제시했다. 이른바 ‘국적 취득 조건부 나용선 계약’이었다. 이것은 해당 일본 해운기업이 선원해외취업 담당주체인 한국 해운회사에게 배를 판다는 매매계약서와 함께 다시 일본 쪽으로 배를 빌려준다는 용선계약을 맺은 후, 한국 측 선사는 승선취업하는 선원인력을 승선시켜 배를 일본 측 선사에 인도하고, 물론 이때 보증 문제는 선박금융에 밝은 일본 해운 측에서 주선하고, 한국측 선사가 지불하는 선가 상환은 일본측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받는 용선료로 지불한다는 내용이다. 이 방법에 의하면 일본 해운선사 입장에서는 저임금 선원의 채용으로 운항비가 대폭 절감되는 효과가 되고, 한국 측 해운선사로 보아서는 선원해외취업과 더불어 용선계약의 종료와 함께 배 한 척이 생기는 것이다. 이 절묘한 방법이 생겨난 데에는 일본해운이 당시 자국 선원 임금 상승으로 운항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한국해운으로서는 선복량 증가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국제간의 해운 융합은 특별한 경우이지만, 세계의 해운계가 한국 해기를 무한정 부르고 있었던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한국 해운인력은 세계의 해운 경영 주체들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선진 해운경영을 경험하고 학습해 나갔다. 이것은 한국해운이 세계적인 규모로 발전해 나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선원해외취업에 나섰던 우수한 해기인력들 중에 상당수가 돌아와서는 국적선사의 해운경영에 참여했으며 자기가 직접 창업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때 해외취업선원들이 벌어들인 외화가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1960년대 70년대 한국 경제 성장기에 ‘수출만이 살 길’임을 인식하고 제품을 만들기 위하여 공장을 지어야겠는데 자본이 없어 어렵게 외국으로부터 차관에 의지해야 하던 시절이었으니.

결국 이시형을 비롯한 초창기 한국해운 건설자들의 불굴의 신념이 옳았던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일어서서 아무도 가지 않는 캄캄한 길을 걸으면서 그들은 오직 해운입국을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들에 의해 양성된 해기인력들-계획조선을 입안한 신태범, 한국선급을 창설한 허동식, 외에도 라스코해운의 김동화, 산코라인의 서병기, 대형유조선 시스타 호의 시험항해에 성공한 김정철과 이관용 등 수많은 해기인력들이 대양을 건너고 있었다. 오랜 시간 험한 파도와, 해상노동이라는 특유의 과노동과, 가정과 사회를 떠난 외로움을 견디면서 그들은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살았다. 이것이 바로 대양을 건너던 우리 선원들의 바다 풍경이었다.

해운계는 물론 우리 사회에 해양사상이 희미해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의 일이다. 경제가 발전되고 육상임금이 오르며 일자리도 많아졌기에 굳이 ‘바다’라는 험한 곳으로 나갈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져 갔고, 그 시절 그들에 의하여 외쳐지던 해양구호는 이제는 오래된 책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바다에 매골’이라는 해양사상, 과연 우리 한국사회에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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