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를 생각하다-‘러빙 빈센트’
고흐를 생각하다-‘러빙 빈센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1.17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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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로서 ‘빈센트 반 고흐’는 내겐 조금 꺼림칙한 존재였다. 그러니까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 이유 없이 우울해졌다. 평소 미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아니지만 그런 느낌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가장 먼저 보게 된 ‘귀가 잘린 자화상’은 차라리 끔찍했다.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른 뒤 그걸 자화상으로 그리다니. 고흐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접하게 된 ‘해바라기’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유명 작품들도 괴상하게만 다가 왔었다. 온통 누런 ‘해바라기’에서는 그의 깊은 우울이 느껴졌고, 소용돌이치는 듯한 별들의 모습이 인상적인 ‘별이 빛나는 밤’은 그냥 혼란스러웠다. 그런 내 느낌에 더해진 유화의 강렬함은 왠지 고통스러웠다. 고흐의 그림은 적어도 내 취향은 아닌 듯 했다.

해서 <러빙 빈센트>라는 영화는 애초에 볼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냥 고흐의 일생을 다룬 영화겠지 싶어 넘기려 했는데 우연찮게 그 작품이 실사가 아닌 유화 애니메이션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전 세계적으로 100명이 넘는 아티스트들이 붙어 10년 동안 고흐풍으로 유화를 그려 그것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는 것.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던 난 결국 <러빙 빈센트>를 보게 됐다.

고흐가 살아생전 그린 작품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유화 애니메이션은 역시나 놀라웠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107분간의 긴 러닝 타임 중 어느 컷을 잘라내 액자에 넣어도 모두 고흐의 작품 같다. 그 때문에 지금 서울에서는 영화의 제작과정과 장면장면을 전시하는 <러빙빈센트展>까지 열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고인이 된 고흐에 대해 예의를 갖춘 것일 뿐, 진짜는 <러빙 빈센트>가 하는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 영화는 고흐가 세상을 뜨고 1년 후의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우체부로 과거 고흐와 친했던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고흐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마을을 찾게 된 아르망(더글라스 부스)은 그곳에서 그 동안 몰랐던 고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건 아르망이 고흐를 알아가는 그 과정은 그 동안 거부감으로 일관했던 고흐에 대한 내 편견이 무너져가는 과정과 같았다는 것. 그 전까지만 해도 아르망 역시 고흐를 ‘스스로 미쳐버린 화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더랬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가면서 고흐가 사실은 얼마나 따뜻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는지 아르망도, 나도 점점 깨달아갔다.

영화 속에서도 나오지만 세상을 뜨기 전 고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는 내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 이 보잘 것 없고 별 볼 일 없는 내가 마음에 품은 것들을. 나는 내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마음이 깊은 사람이구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고흐는 살아생전 단 한 점의 그림만을 팔았다고 한다. 지독하게 가난했지만 돈과 명예보다는 언제나 예술 그 자체를 추구했다는 뜻. 그리고 그의 예술이 향했던 곳은 자신처럼 가진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보다 그들을 향한 그의 가늘고 약하지만 진심어린 마음이 유화 물감과 함께 캔버스에 녹아들어 작품들을 완성시켰던 거다.

800여점에 이르는 고흐의 작품들은 현재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한 화가의 그림이 한 공간에 그리 많이 있을 수 있는 경우는 드문데 그건 고흐의 친동생인 테오가 죽은 뒤 그의 아내가 고흐의 그림들을 한 번에 기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흐와 관련해서는 유명한 팝송도 하나 있다. 바로 미국 가수인 돈 맥클린(Don Mclean)이 부른 ‘Vincent’라는 곡이다. 난 익히 알고 있었던 이 유명한 곡이 고흐를 위한 곡이었는지 <러빙 빈센트>를 보고서야 겨우 알게 됐다. 이 곡의 가사 내용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이 세상은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당신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당신이 얼마나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그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나도 이제 고흐를 조금 알 것 같다. 그는 예술가를 넘어 인류의 작은 구원자였던 거다.

2018년 12월13일 재개봉. 러닝타임 107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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