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듣다가 문득
음악을 듣다가 문득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1.16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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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튼다. 퀘스천 오브 칼라. 금세 공간은 그녀의 목소리와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로 넘실댄다.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나르는 꺼풀이 달린 눈과 달리 귀는 꺼풀이 없어서 닫을 수 없다고 했던가. 그저 들어야 한다면 잘 선택하고, 신중하게 고르고, 아낌없이 마음을 열어야 할 터.

금세 경계를 넘어오는 음악을 가슴 벅차게 보듬는 일은 오롯이 내 몫이다. 아티스트의 진심이 몰려오고, 악기의 음색이 향기롭고, 선율의 리듬이 출렁일 때 우리는 ‘역시’라는 낱말을 뱉는다. 음악의 울림과 내 심장의 공명이 하나가 되는 시간은 ‘다시’라는 낱말과 합쳐 길고 긴 여정을 준비한다. ‘역시’와 ‘다시’를 왕복하는 음악은 곱씹을수록 맛이 나는 담백한 요리를 닮았고, 들을수록 재미나는 옛이야기처럼 그윽하다.

어떤 음악을 듣는가는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좋은 방법이다. 음악만큼 세대 차가 뚜렷하고, 취향 차이가 드러나고, 개성이 묻어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문득 가사를 생각하며 듣다가 타인을 부르는 호칭에 생각이 머문다.

나는 타인을 어떻게 부르고 사는가? 많은 이들이 이누이트를 에스키모라 부르고, 초몰룽마를 에베레스트라 부른다. 어떤 가수는 아예 팬을 삼촌이라고 부른다. 이른바 삼촌 나이쯤 되는 팬들이 많이 생겨 부른 모양이지만 마뜩찮다. 왠지 삼촌이라는 호칭에 기대 가수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 여자 가수와 나이 지긋한 팬 사이의 친밀함을 내세우는 마케팅이 내겐 일종의 롤리타 증후군을 교묘하게 포장한 것처럼 보인다. 지나친 생각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제 그 가수가 오롯이 음악만으로 팬들과 교감하기를 바란다.

요즘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이들이 제법 많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남편을 으레 오빠라고 일컫는 이들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아이 앞에서도 그렇고 시부모, 친정 부모 앞에서도 그렇다. 연애 시절, 오빠라 불렀더라도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겨도 계속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까닭은 뭘까? 물론 습관을 고치기 힘들다고, 어떻게 부르든 무슨 상관이냐는 답도 많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미 그렇게 부르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더 자연스럽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호칭은 관계의 위상을 보여주는 기본인 동시에 잣대이다. 이런 관점에서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일은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무릇 부부관계의 기본은 수평이자 평등이다. 오빠와 여동생은 아무리 생각해도 평등한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은 아니다. 오히려 수직적이다. 결혼해서 계속 오빠라는 호칭을 고집(?)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지 싶다.

지아비와 지어미, 남편과 아내, 허즈밴드와 와이프, 집사람과 바깥양반, 신랑과 색시, 영감과 마누라, 서방님, 낭군님 따위처럼 부부를 일컫는 낱말은 많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변했다. 여보, 당신이라는 호칭 대신 남편을 아빠라고 부른다고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던 시절도 지나갔다. 오빠가 아빠 된다는 우스개도 생각난다. 불평등한 호칭으로 부르다 보니 부부간에 통용되는 말도 많다. 혼이 났다니, 허락을 받는다느니 하는 말이 그것이다. 둘 다 수직적 관계에서 나오는 말이라 생각한다. 수평적인 관계에서는 결코 쓰지 못할 말이다.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일은 어쩌면 타인을 제대로 부르고, 다른 누군가가 나를 잘못 불렀을 때 제대로 고쳐주는 일일 터. 오빠와 동생 관계에서 수평적인 부부관계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적절한 호칭을 부르는 것은 올바른 삶의 태도의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묵직한 노래가 계속 흐른다. 불평등을 세상에 외치는 그들의 함성은 되풀이된다. 가수의 목소리는 음악의 숲을 떠도는 정령처럼 웅숭깊다. 더할 나위 없다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 찰나의 시간이 쌓여 억겁의 영원으로 변한다. 가수의 목소리는 아름드리나무가 가득한 숲, 나무 기둥 사이를 뚫고 직진하는 굵은 빛줄기처럼 절정을 향해 치솟는다.

다시 그들의 목소리가 그리울 무렵, 이 노래를 또 들을 것이다. 가사에 담은 마음, 노래 이면에 숨은 이야기를 세세하게 기억하리라. 피부의 빛깔로 타인을 짓밟고 억압하던 시절, 타인을 부르는 잘못된 호칭, 직위가 지배하는 세상을 벗어나 동등하고 평등하게 서로를 마주하는 세상을 꿈꾼다.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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