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24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24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1.15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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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부길이 해운국장직을 사임하고 국립해양대학의 학장직을 맡으면서 해양대학과 UNKRA(유엔한국재건단) 간에 해양대학 교사를 건립한다는 양해각서를 채택했다. 정부 관련 부처에서도 해양대학 건립 안이 급물살을 타면서 정부재정 11억5천만 환, UNKRA 자금 35만 달러로 학교를 신축하기로 최종 결정안이 나왔다.



학교의 위치는 이미 그 즘에는 부산이 항구로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으로 하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 그렇지만 부지가 문제였는데 여러 가지로 모색한 결과 영도의 동삼동 중리, 지금의 남고등학교 자리로 결정되었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 진입로를 닦아야 했는데 이를 위하여 거제리 천막교사에서 학생들이 반별로 날마다 교대로 트럭으로 이동하여 공사에 동원되었다. 학생들은 트럭에 실려 가면서 시내가 떠나가도록 ‘웅지를 못 이루면 귀향 안 하리’로 시작하는 해대요가 8절을 불러 대었고 사람들은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시대에서나 있을 수 있는 풍경이었다.



교사 건물이 올라가자 해운 ? 해기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슴이 설Ž 날마다 키가 자라는 건물을 보며 누군가 말했다. 학장님, 저 산 이름이 뭔지 아세요? 고갈산이라 부르기도 하고 봉래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제부터는 봉래산이라 불러야 해요. 봉래란 말은 참 좋은 말이래요. 그 뜻은 파라다이스랍니다. 우리는 지금 파라다이스에 와 있는 겁니다. 때는 영도 봉래산에 나무가 별로 없어서 고갈산이라 부르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해운계에 나돌기 시작했다. 정부와 경무대에서는 교사가 완성되면 해군사관학교와 학교를 통합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국방부 쪽이었다. 국방부의 주장은 이러했다. 지금 남해안 서해안에서 각종 해양사고가 터지고 있다. 선박을 운항하는 해기사의 자질에 문제가 있다. 또, 빈곤한 국가 재정에서 어렵게 마련한 외화로 외국에서 고가의 화물선을(이재송의 인수팀이 인수한 거의 폐선에 가까운 노후선 ‘천지호’로 추정된다) 인수하게 했는데 오다가 기관고장을 일으키고 책임자인 선장은 무단하선하고, 이런 것들은 모두 해기사를 교육하는 해양대학의 교육 체계의 잘못이다. 그에 비하면 해군이 인수한 함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해군사관학교의 교육체계는 뛰어나다. 만약에 두 학교를 합친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물론 해양대학은 이에 대하여 찬성하지 않았다. 그 후 들리는 말로, 경무대에서는 여섯 번 일곱 번 대통령의 유시가 있었다고 한다(대통령의 유시가 법적으로 얼마나 효력이 있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 사안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불만을 가졌는지, 또 멀리 부산의 해양대학 학교 당국으로서는 얼마나 잘 인지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대통령이 해양대학을 결코 ‘예쁘게’ 보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은 있었던 것 같다. 해양대학 교사가 준공되기 전 1955년 3월에 부산을 순시하러 내려왔던 이승만 대통령은 UNKRA 단장 콜터를 대동하고 영도 동삼동의 해양대학 신축공사장을 찾았다. 여기에서 이 대통령은 학장 황부길(당시는 학장직을 황부길이 맡았다. 이시형은 학교 발전을 위하여 할 수만 있다면 적임자에게 학장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학교가 어려운 시기에는 스스스로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았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한국 해운계를 위하여 해양대학이 제대로 역할 수행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해군사관학교의 교육 시스템이 훌륭하다는 점, 해군사관학교에도 최신의 시설이 필요하다는 점, 그래서 양 학교를 합치면 가장 이상적인데 왜 비협조적이냐고 황부길에게 따졌다. 황부길은 묵묵부답,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콜터 단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는 UNKRA 원조 자금에는 북한과 친교를 맺은 국가의 것도 있다, 그런데 이 자금을 군사적 목적에 사용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승만은 황부길에게 그렇다면 학교를 잘 지어 학생들 교육을 잘 하라고 짧게 말을 끝맺고 자리를 떴다.



그 일이 있고 꼭 3개월 후에 황부길은 학장직을 사임했다. 스스로 사표를 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후임에는 이시형이 다시 학장직을 맡았다. 둘의 사이는 전에도 이랬다. 물론 정부 관련 부처의 승인이 나야 하지만, 이시형 외에는 달리 이 어려운 해양대학을 맡을 인사가 없는 현실이었다. 두 사람은 나이는 5살, 도쿄고등상선학교의 1년 차 선후배였다. 둘은 일본에서 해기유학할 때부터 지금까지 동고동락을 같이 한 한국 해운을 위해서는 뜨거운 동지였다.



1955년 11월, 국립해양대학이 동삼동에 준공되던 날 학교는 간판을 ‘한국해양대학’으로 새로 달았다. 그날 준공식에는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과 해군 장성들과 해운계 인사들이 내빈으로 참석하여 해운 한국을 이끌고 나갈 해양대학의 앞날을 축하했다. 준공식을 마치고 이시형은 운동장에 서서 봉래산 자락에 자리 잡은 하얀 교사를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앞날에 대한 생각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과연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 항해과 50명, 기관과 50명, 이렇게 배출될 텐데. 그렇게 되면 1년에 100명씩, 2년이면 200명, 5년 후에는 500명, 10년이 지나면 모두 1,000명인데. 그렇게 되면 상선이 최소한 100척 이상이 있어야 할 텐데. 과연 가능할까? 지금 한국 경제의 규모로는 어려울 텐데. 배를 용선하면 가능할까? 아니면 외국 선주 선박에 승선한다면……? 이런 현실 문제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은 꿈만 같기도 했다. 그를 괴롭히던 모든 시련들이 지나간 것이다. 그는 그 날 준공식 뒤풀이를 하면서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소. 난 그 날 내 나이 35살 때였지. 화물선 ‘고토마루’에서 1등기관사로 있을 적 수송선단에서 내 앞에 가던 배가 잠수함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것을 봤다오. 배가 모항으로 돌아오자 병이 있다 둘러대고 곧바로 하선했지. 그러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다오. 내 이제부터의 삶은 덤으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말이오. 이제 이렇게 학교가 완성되었으니 이제 내가 세상을 하직해도 여한이 없다오. 물론 이시형은 지인과 함께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그랬다. 여기까지였다. 이시형의 행복은 여기까지였다. 시대는 이시형을 여기까지만 필요로 했다. 이시형은 그것을 몰랐다. 마치 마젤란이 그렇게 찾았던 향료군도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필리핀의 작은 섬에서 마음을 놓은 것처럼 그랬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6년 늦가을에 당시 해운계에서는 전설로 일컬어지던(일반 사회에서는 좋지 않은 평이었지만) 신성모가 불쑥 찾아왔다. 그리고 이시형이 있는 학장실로 향했다.



마젤란과 이시형이 당한 일격은 유사한 점도 있지만 명백한 차이는 그 상대가 마젤란의 경우는 아주 작은 섬의 추장이었고, 이시형은 감히 넘을 수 없는 큰 산과 같은 존재인 신성모였다. 일찍이 해양국가인 영국에서 자국인도 갖기 어려운 엑스트러마스터 자격을 취득했고, 귀국해서는 현 이승만 정권에서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여전히 대통령의 최측근인 당시 나이는 60대 중반인 신성모였다. 그는 이시형을 보자마자 이제부터 학장은 자기라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그것이 이시형의 학장직과 교수직의 마지막이었다.



신성모는 매우 치밀하고 강력한 추진력의 소유자였다. 누가 보아도 해양대학에 미운 털이 박힌 이승만이 그 미운 털을 빼기 위하여 신성모를 내려 보냈다고 짐작할 터였다. 이시형이 해양대학에서 쫓겨나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더욱 문제는 그의 거처였다. 거주하고 있던 학교 관사에서 나오면 가족들을 이끌고 어디 갈 데가 없었다. 퇴직금도 없었고, 월급이 박봉이기도 했지만 원체 이재에 어두워 저축해 둔 것도 없어, 때는 겨울 초입이지만 셋방도 구하기가 어려웠다. 스승의 이런 딱한 사정을 알고 제자인 박현규를 중심으로 한 해양대학 동창회에서 모금하여 살 집을 마련해 드렸다는 이야기는 해운계에서는 오랫동안 들려지는 미담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한 동안 무직으로 새 집에서 칩거하다가 대한해운공사의 선박에서, 60년대에는 해외취업선에서, 때로는 급여를 받지 않는 해기사협회장직을 맡으며 한국 해운 해기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했고, 말년에는 몇 년간을 한국해양대학으로 돌아가 명예교수를 지냈다. 1985년 4월, 세상과 이별할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14. 글을 맺으면서



현대 국가의 자본주의 경제사회 운영체계는 대륙 간 물류 수행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물류 수행의 핵심은 해운산업이다. 해운은 그 자체로서 수익을 창출하는 의미가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자국 선대의 확보는 안정적인 물자수송 능력을 담보하여 그 나라의 경제사회의 유지에 이바지하는 바가 크고 또, 전시에는 군수물자와 민수물자 군병력과 민간인의 이동을 수행하는 등, 특히 바다를 끼고 있는 국가에게는 해운의 중요성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일제강점기에 태평양전쟁 중 미 잠수함 공격을 받으며 군수물자를 수송해야 했던 죽음의 항해에서 살아남은 우리 해기사들이 해방이 되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해기사 양성 교육기관의 설립이었다.



그들 한국해운 1세대들은 자라나는 해운계 후진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들은 한결 같이 신생 조국의 앞날을 바다에서 찾았다. 이것은 그야말로 예언처럼 적중했다. 해방되고 일인들이 철수하고 난 한반도는 황무지 그 자체였다. 맨손으로 일어서야 하는 차가운 현실에 해운의 필수 요소인 선박도 화물도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해운을 수행할 해기사를 양성하겠다니 말이 되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은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에게는 사회일반이 이해하지 못할 사명감이 있었다. 꾸역꾸역 고통 고난을 참고 열심히 하니 국제 사회가 감동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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