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작 ‘증곡 천재동’ 12주기에 재공연”
“미완의 작 ‘증곡 천재동’ 12주기에 재공연”
  • 김정주
  • 승인 2019.01.15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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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수 극단 푸른가시 대표, 연극-언론 갈림길서 ‘연극’에 낙점
전우수 극단 푸른가시 대표.
전우수 극단 푸른가시 대표.

연극과 언론, 두 길을 번갈아 걷다가 인생 중반의 쉼표를 ‘연극’에다 찍었다. 지금 생각으론 쉼표가 마침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전우수 ‘극단 푸른가시’ 대표. 울산대 82학번이면 올해 만 56세, 시쳇말로 ‘한창 나이’다. 특정 인물을 내세운 연극(‘증곡 천재동’)을 처음 무대에 선보인 것도 나잇값을 의식해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도 하나 참 잘했다는 말을 의외로 많이 듣고 있고, 그 때문에 소명의식 비슷한 마음의 빚이 자꾸 커져만 간다.  

‘증곡 천재동’을 중구문화의전당 함월홀에 초연(初演) 작품으로 올린 것은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지난해 12월 26일 저녁나절. 객석 400석 가운데 300석이나 찰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관람석에는 천재동 선생(1915~2007)의 아드님 천영배 씨(72),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로 구경 나온 정천석 구청장과 동구청 식구들도 자리를 같이한 채 시선을 1시간40분짜리 공연 무대에 집중시켰다. 동구 방어진이 안태고향인 천재동 선생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 보유자’이기도 한 분.

“사실 천재동 선생님을 살아계실 때 뵌 적은 없습니다. 후배 연극인인 제가 자주 모셨던 범곡 김태근(1920~2011) 선생님이 이따금 귀띔해 주셔서 아는 정도일 뿐이지요.” 지난 11일 오전 중구 문화의거리 24 ‘극단 푸른가시’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만난 전우수 대표의 말이다. 부산 성지로가 현주소인 천영배 씨와 수인사 나눈 것도 이날이 처음. 영배 씨는 ‘부친의 예술혼을 이어받아 토우(土偶)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있다’는 게 전 대표의 귀띔이었다.

그래도 그 이전, 몇 차례 통화는 있었다. 작품의 완성도도 높일 겸 감수(監修)를 특별히 부탁한 데 따른 것. “이 대목 맞습니까? 이건 어떻습니까? 하고 일일이 여쭈었죠. 유족 분들의 마음, 조금이라도 상하게 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기우 ‘천재동 연구소장’이 가교役

1988년 7월 첫걸음마를 뗀 극단 푸른가시는 창립 시기가 ‘극단 울산’보다는 뒤처진다. 하지만 ‘울산 최장수 극단’이란 자부심만큼은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창단 이후 30년간 112회 정기공연을 가진 지역 최장수 관록의 극단’이란 소개말에는 거짓도 과장도 끼어들 틈이 없다. 전 대표가 손수 희곡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증곡 천재동’도 어찌 보면 푸른가시 30년 역사의 정신적 기념비 같은 것.

그러나 ‘연극으로 떼돈 벌었다’는 얘기는 아직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연극인생이란 그만큼 피 말리는 ‘지갑과의 전쟁’ 같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정도가 지방일수록 심하다는 건 이미 상식이다. 그래서일까. 전 대표는 ‘돈’ 소리가 나오자 피식 웃고 만다. “자주 받는 질문의 하납니다. ‘지원 좀 해주나?’ ‘적자 아니냐?’ ‘어렵지 않느냐?’ 하는 식의 질문들. 그 때마다 절벽과 마주치는 기분입니다, 허허…”

극단 대표의 ‘고뇌 목록’에는 그런 일도 들어간다. 월세 75만 원에다 단원 20명여 명의 수고비(?) 챙기는 일도 단장의 책임이니까. 지난 한해의 마무리 연극 ‘증곡 천재동’에 대한 미안함도 그래서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지원금 신청 준비에 시간 뺏기느라 연습이 충분치 못했다는 아쉬움이 마음 한구석에 앙금으로 남았다 할까. “늘 아쉬운 게 지원금 문젭니다, 고맙긴 해도 그것만 바라다가는 더 이상 연극을 못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밑줄 그은 곳이, 새해엔 ‘증곡 천재동’의 공연 횟수를 좀 더 늘려야지 하는 각오 부분이었다. 이 결심에는 예인(藝人) 천재동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준 이기우 소장(‘인간문화재 천재동 연구소’ 소장)과의 인간관계가 연결고리 구실을 했다. (증곡 선생은 연극, 미술 할 것 없이 다방면에서 재능이 뛰어난 예인이란 평가를 받는다.) 전우수 대표가 언론 활동에 주력할 무렵 이 소장은 동구 현대예술관에서 ‘기획’ 책임을 맡고 있었다.

단원들의 꿈은 상설무대 갖는 것

사실 ‘극단 푸른가시’ 사무실은 쓰임새가 ‘사무’에만 그치지 않는다. 연극소품 보관창고도, 70인 객석의 소극장 기능도 동시에 갖추고 있다. 

“바짝 당겨 앉으면 70석은 거뜬합니다.” 전 대표의 말에 힘이 들어가 있다. “그래도 정극단(正劇團=울산연극협회에 가입한 9개 극단) 중 문화의거리에서 자체 극장 가진 극단은 우리밖에 없을 겁니다. 단원들의 긍지가 대단한 건 바로 그 때문이죠.” 

남구 신정초등학교 가까이에 있던 극단 사무실을 문화의거리로 옮겨온 것은 5년 전의 일. 원래는 ‘쑥 찜질방’이었지만 단원들이 손품, 발품 다 팔아가며 치워낸 덕분에 제법 번듯한 새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전 대표는 그 당시를 떠올며 ‘상설’이란 말에 힘을 주었다. “단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바란 것은 ‘상설극장’이었습니다.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대표인 제가 총대를 메게 된 거죠.”

다행히 그의 이력 속엔 ‘예술경영 전공’도 들어가 있다. 극단이 명맥을 31년째 이어온 것도 그의 이 남다른 ‘달란트’(재능) 덕분인지도 모른다. 전 대표는 자신만의 노하우와 흥미로운 얘기를 잇따라 들려주었다. “예술경영만 놓고 본다면 문화예술단체 가운데 진보 쪽(민예총 계열)은 ‘박사급’ 소리 들을 정도로 치열하고 노련한 면이 있어요. 반대로 보수 쪽(예총 계열)은 서툰 면이 많아서 판판이 지는 일이 다반사였죠. 그래서 제가 건네는 조언이 있습니다. ‘기획서 잘 만들고 정산 잘하라’고 말이죠.”

이 대목, 설명이 조금 더 이어졌다. “‘자존심 팔아가며 예술을 해야 하나?’ 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데 자존심 깎인다고 생각지 말고 예술을 만든다고 생각하라고 타이르곤 하죠.” 보수 쪽은 그래서 ‘적자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게 그 나름의 진단이다.

지난해 12월 26일 중구문화의전당 함월홀에서 가진 ‘증곡 천재동' 공연을 끝낸 후 기념촬영에 임한 ‘극단 푸른가시’ 단원들.
지난해 12월 26일 중구문화의전당 함월홀에서 가진 ‘증곡 천재동' 공연을 끝낸 후 기념촬영에 임한 ‘극단 푸른가시’ 단원들.

 

‘천재동 문화의 길’, 기념관도 추진

‘증곡 천재동‘의 두 번째 공연은 이미 예약이 끝난 것도 같았다. 그 이면엔 이기우 소장의 열정과 끈기가 숨어 있다고 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처럼 점심시간이 가까운 시각, 이 소장이 소극장에 얼굴을 내밀었고, 일행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소장의 말에는 간간이 귀가 번쩍 뜨이는 대목도 있었다. “부산 사시는 천영배 선생의 희망은 ‘천재동 기념관’을 부친이 태어나신 방어진에 만들어 유품을 상설 전시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다만 기념관이 제 모습을 다 갖출 때까지는 울산박물관에 ‘조건부 기탁’을 하겠다는 말도 하십디다.” 그의 부산 자택에는 엄청나게 많은 부친의 유작(遺作), 유품(遺品)들이 창고 속에 가득 차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증곡 천재동 선생의 부인은 항일독립운동가 서진문 선생의 외동딸인 서정자 여사. 증곡 선생은 두 말 없이 서 여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고, 영배 씨는 그 두 분의 애정 속에서 태어났다. 증곡은 당신의 생전에 고향 울산 방어진에 묻히고 싶어 했으나 유족들의 의향에 따라 부산 영락공원에 일시 안장됐다. 하지만 증곡은 사후에 아들 영배 씨의 꿈자리에 자주 나타났고, 이를 기이하게 여긴 유족들은 가족회의 끝에 유골을 방어진 숲속에 뿌리기로 결론을 내린다.

막이 오르면 대왕암을 배경으로 증곡을 향한 서 여사의 독백이 공원을 감싸기 시작한다. 전우수 단장의 연극 ‘증곡 천재동’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편 울산박물관은 증곡의 타계 12주기가 되는 7월 26일 즈음 ‘천재동 특별전’을 열기로 하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극단 푸른가시도 그 시기에 맞춰 ‘증곡 천재동’의 두 번째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 또 동구청은 유족들의 뜻을 존중해 ‘천재동 문화의 거리’와 ‘천재동 기념관’을 동구 지역에 조성·건립하는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희망적인 분위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혹자는 시대의 흐름과 연극 ‘증곡 천재동’의 탄생, 그리고 천재동 연구소의 내공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라는 이색적인 풀이를 내놓기도 한다. 

‘다양한 세대 끌어안는 연극’에도 눈길

전우수 대표는 지금 ‘방향타(方向舵) 선회’ 문제로 고민 중이다. 대학 4학년생 딸과 고교 1년생 아들의 애정 어린 쓴 소리가 귓전을 떠나지 않는 탓도 있다. “아빠, 옛날 얘기만 하지 마시고 연극 패턴 좀 바꿔 보세요. 저희 세대엔 안 맞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 다른 작가분 작품도 이따금 접해 보세요.”

그는 두 자녀의 뜻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나름의 결심을 내비친다. △희곡은 1년에 한 편은 꼭 쓸 것. △‘극단 무대 상설화’의 꿈에 꾸준히 도전할 것, △다양한 연령대를 끌어안는 연극에도 눈을 돌릴 것 등이 그것.

연극을 택했다는 전 대표가 아직 손을 떼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지역 방송사의 인기 프로그램인 ‘딱따구리 아지매’와 ‘제보자’의 작가 역할이다. 그의 실력을 인정한 방송사 쪽은 그를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이처럼 그의 경험들은 다양하다. 울주군지편찬위원회 상임위원과 집필위원(2000~2002)을 지내면서 울산 곳곳에 드리워진 ‘보도연맹 잔혹사’를 두 눈 똑똑히 눈여겨본 것이 그 첫째다. 이밖에도 그는 90여 편의 연극에 직접 출연하거나 연출을 책임졌고, 울산예총 사무처장(2002~2008)을 지냈으며, ‘은미’ ‘풍선’ ‘불매야 불매야’와 같은 창작희곡 10여 편을 발표했고, 지난 연말엔 ‘증곡 천재동’ 초연에 때맞춰 ‘전우수 희곡집 푸른가시’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이제 연극인의 삶에서 인생의 참맛을 음미하려고 구두끈을 다시 동여맨다. 한동안 열정을 쏟았던 어느 방송사 보도부장직을 미련 없이 버린 것도 연극만이 갖는 무한대의 흡인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우수 극단 푸른가시 대표. 그에게는 울산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부산대 대학원에서 ‘예술경영 전공’ 과정을 수료한 울산 연극계의 재원이란 평가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 글= 김정주 논설실장, 사진= 장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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