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산업·정보화 사회를 다 겪은 소회
농경·산업·정보화 사회를 다 겪은 소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1.14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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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에 가보면 우리 역사상 국민 누구나가 존경하는 두 분 영웅이 있다.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다. 한 분은 임금이며 학자라 앉아 있고 한 분은 칼을 차고 전쟁터를 누비던 분이라 서 있다. 하지만 두 분 모두 수천 년 이어온 농경사회에서 생활하던 분이다. 봄이 되면 모내기를 하고 가을이 되면 추수를 하면서 한해 먹거리를 장만하는 단조로운 농경생활이었다. 비가 안 오면 하늘만 쳐다봐야 하는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필자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농경문화에 더 익숙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현대에 입사한 후 새로운 산업문화를 접하게 된다. 오이, 가지, 고추, 깻잎, 애호박 등을 텃밭에서 그냥 따 와서 조리해 먹으면 되던 것을 일일이 돈을 주고 시장에서 사먹어야 하는 현실이 처음엔 낯설었다. 별 보고 출근, 별 보고 퇴근, 하루 2교대, 3교대, 4조 3교대 작업 등 여러 과정을 겪으며 조국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위하여 나름대로 젊음을 고스란히 바쳤다. 이처럼 많은 선배들이 피땀 흘려 온갖 노력을 경주한 결과, 변방의 조그만 도시에 불과하던 울산이 오늘날 대한민국 산업수도가 되었다. 지금은 울산의 주력산업이 성숙기에 도달하여 새로운 신산업을 만들어야 하며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조류에 맞서 극복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학창시절에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있었고 농촌에서는 농한기가 있었다. 하지만 필자가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하던 울산공단 초기 시절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으레 출근했다. 다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지금처럼 주 52시간, 욜로, 워라벨, 소확행 같은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저 먹고살기에 급급했다. 그 후 한국경제가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회사도 덩달아 커지면서 아파트 생활, 승용차 출퇴근, 비행기 해외출장, 호텔 숙식 등 선진국 산업문화를 열심히 좇아가기도 벅찼다. 그에 따라 압축된 경제발전은 암울한 노사분규의 그늘을 만들었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며 큰 장애요인으로 앞을 가로막고 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하여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지고 농경사회에서는 전례가 없는 퇴직을 하기에 이른다. 감사하게도 때마침 울산대학교에 자리가 있어 산학협력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산업정보경영공학부에서 정보화사회와 몸소 부딪치면서 배우게 되었다. 정보화사회란 컴퓨터와 정보통신기술이 융합된 네트워크 사회로서 정보의 가치가 사회의 중심 자원으로 이용되는 사회다. 이메일을 주고받고 핸드폰으로 지인들과 소통하면서 그 편리함에 고마움을 느끼지만, 너무나 많은 기능을 다 익히지 못해 초등학생 손자에게 배우는 난감함을 겪기도 한다. 이럴 땐 기술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한계를 느낀다.

장자를 보면 그림자가 싫어서 계속 도망가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그림자도 더 빨리 달려오니 그는 더 빨리 달아나려고만 한다. 장자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당신이 나무 그늘에서 쉬면 그림자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오”라고. 한 세대 만에 농경사회와 산업사회 그리고 정보화사회를 다 겪은 사람을 행운으로 여길지 불행하다 해야 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을 경험하지 못한 선현들의 책 속에서도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돌아보면 각 사회마다 거기에 맞는 장단점이 있는 건 틀림없다. 참 난감하다.

농경사회만 경험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이런 경우에 어떤 답을 주실지 궁금하다. “나도 가보지 않은 길이니 갈 때까지 가봐라” 하실까. “그건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서로 다를 뿐이다” 하실까.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보지 않은 길’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중략) 먼 먼 훗날 어디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려나. 어느 숲에서 두 갈래 길 만나, 나는 덜 다닌 길을 갔었노라고. 그래서 내 인생 온통 달라졌노라고.” 이젠 장자의 충고대로 나무 그늘에서 조금 쉬어가려고 간다. 이제 그래도 되지 않겠나. ‘Slow Life, Slow Food’라는 문구에 자꾸 눈길이 간다.

김기병  NCN 전문위원·前 울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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