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울산사람들의 목욕문화 엿보기
옛 울산사람들의 목욕문화 엿보기
  • 김보은
  • 승인 2019.01.13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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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원연합회 ‘울산지역문화연구’ 발간지역 최초 목욕문화 조명… 구군별 정리첫 공중목욕탕은 동구 방어진의 ‘전탕’

 

과거 울산사람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목욕을 했을까. 최근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연구지가 나와 눈길을 끈다.

울산시문화원연합회가 발간한 울산향토사 통합연구지 제6호 ‘울산지역문화연구’에서는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울산의 목욕문화를 조명했다.

중구, 동구, 북구, 울주군 등 구군별로 나눴으며 최명훈 중구문화원 이사, 장세동 동구지역사연구소장, 박중훈 북구문화원 이사,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가 집필했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울산 사람들은 집 또는 강가에서 목욕을 즐겼고 이후에는 일본인에 의해 ‘공중목욕’이 대중화됐다는 공통된 의견을 제시했다.

최명훈 중구문화원 이사는 “중구는 남쪽으로 태화강, 동쪽으로 동천강이 흘러 목욕하기 좋은 자연조건을 갖췄다”면서 “1930년대 일본인들이 집에 목욕시설을 차려놓고 목욕을 즐기면서 오덕상, 김한경씨 등 한국인 중에서도 목욕탕을 따로 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밝혔다.

△목욕탕 굴뚝이 보이는 방어진 상가(1930).
△목욕탕 굴뚝이 보이는 방어진 상가(1930).

 

울산에서 처음 ‘공중목욕’이 일반화된 곳은 ‘방어진’이다. 동구는 삼면이 바다를 낀 해안마을이라 내륙보다 다소 이른 시간에 목욕문화가 유입됐다.

장세동 동구지역사연구소장에 따르면 1908년 ‘한국어업법’의 공포로 한국내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어업권을 인·허가하면서 동구 방어진 지역에 일본 어민의 이주가 촉발됐다.

이에 따라 방어진 연안에 어업 관련 시설과 식당, 유흥가 등 일반 생활문화시설이 생겨났고 돈을 내고 목욕하는 공중목욕탕 ‘전탕(錢湯)’이 처음으로 보급됐다. 특히 해방을 맞으면서 일본인들이 두고 간 목욕탕을 재활용하면서 공중탕을 이용하는 생활이 익숙해졌다.

동구 방어진과 달리 북구는 비교적 최근에서야 현대식 목욕탕이 생겼다.

박중훈 북구문화원 이사는 “북구의 목욕문화는 경동선 혹은 동해남부선과 그 역사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농소 호계역 인근에 일제강점기 이곳에 근무하던 일본인 직원들에게 제공하던 관사가 있었는데 1945년 광복과 함께 한국인들이 관사를 목욕시설로 사용했다”며 “점차 현대식 대중목욕탕이 영업하면서 이 목욕시설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운흥사 석조.
△운흥사 석조.

 

울주군의 경우 오래전 스님들이 목욕을 했던 고찰이 남아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는 “웅촌 운흥동천에 있는 운흥사(신라 제26대 진평왕때 건립)에는 4기의 석조가 있는데 이 중 서쪽에 있는 석조는 모양새로 보아 스님들이 목욕을 하기 위해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어 “사찰에는 예불이 자주 열렸고 스님들은 예불을 올리기 전 몸을 단정히 하기 위해 목욕을 했다. 운흥사에도 목욕문화가 일찍부터 생겨났다”고 예상했다.

이외에도 연구지에는 △서울대학교 노관택 명예교수 인터뷰 △신형석 울산대곡박물관장의 ‘고려시대 헌양현(언양현)의 행정 중심지와 지역사회’ △신춘희 시인(울산이야기연구소장)의 ‘근현대 울산 정신 문화 예술의 산실을 찾아서’가 실렸다. 김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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