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23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23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1.08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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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은 수면 아래로 내려져 해저 펄에 박히면서 선박의 정박이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데서 묵묵히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들의 상징이다. 사진은 해양의례 활동에서 닻 형상을 구현해 내는 학생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닻은 수면 아래로 내려져 해저 펄에 박히면서 선박의 정박이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데서 묵묵히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들의 상징이다. 사진은 해양의례 활동에서 닻 형상을 구현해 내는 학생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 후에도 이시형은 YMS에 학생들을 모았는데 결국 이 기간에 이 작은 배는 해양대학의 존재의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 해 10월 서울을 수복하자 이시형과 남은 교직원들은 군산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 군산은 그 때의 군산이 아니었다. 군산의 주택과 항만, 산업시설과 교육시설이 부서져 버렸는데 해양대학도 그 피해를 비켜나갈 수 없었다. 미곡 창고를 개조하여 시설한 식당만 남았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다시 해양대학의 군산시대가 시작되었다. 턱없이 부족한 교직원, 학생이었지만 이시형은 학사를 진행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수개월 후, 전황이 재역전되어 다시 공산군이 밀고 내려왔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나자 이시형은 다시 부산으로 옮겨갔다. 이렇게 해양대학은 다시 부산에서 학교를 차려야 했다.

당시 부산은 임시수도의 정부 인사들과 정치인들 경제인들은 물론 전국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혼란정국이어서 국립해양대학이 수업을 진행할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학장인 이시형이 이리저리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부탁을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아마 이러한 어려움에는 사회일반의 국가 기간산업으로서 해운에 대한 이해부족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어렵게 해운대국민학교의 교실 몇 개를 빌릴 수가 있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이시형은 몇 남지 않은 교직원과 4,50명의 학생들과 함께 학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 해 가을 38도선 근방에서 피아간에 일진일퇴를 하는 긴박한 전황이 계속되자 이시형은 학생들에게 군 입대를 권유했다. 많은 학생들이 스승의 말을 따르면서 군에 입대했다. 후에 전황이 호전되자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로 복학했다.

언제부턴가 이시형의 국립해양대학은 부산 거제리(지금의 거제동)의 교통고둥학교 부지에 천막을 짓고 교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늘 그래왔지만 학생들은(물론 몇 명 되지 않는 교직원들도) 아침이 되면 이곳저곳에서 물려들어 천막교사의 급식으로 아침식사를 했고, 오전 수업, 점심식사, 오후수업, 저녁식사, 이렇게 진행되었으며 저녁이 되면 주변의 민간 주택 하숙집에서 지내고 다음날 아침에 일찍 다시 등교하는 식이었는데, 학생은 물론 학사 운영을 하는 교직원들의 수고가 말이 아니었다. 부족한 시설에 부족한 급식에 게다가 학생생활 지도도 큰 문제였다. 기숙사를 갖추고 승선생활을 선험교육해야 하는데 일과 후에는 학생들이 민가로 흩어지니 난감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는 학교의 미래가 너무나도 어둡다는 데에 있었다. 국립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가난한 국가가 전쟁을 겪고 있어서 정부의 재정 지원이 매우 어려웠고, 학교가 존속할 수 있는 교사건물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니 학생들은 자꾸 학교를 떠나갔고, 월급이 열악한 교직원들도 하나씩 둘씩 사직했지만 이를 말릴 수는 없었다(그들 외양항해 가능한 상위급 해기사들은 당시 현직에 자리가 있었고 높은 급료를 받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천막교사에 비가 새어서 새지 않는 옆 천막으로 이동하여 수업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이시형이 갑자기 힘이 빠지며 주저앉았다. 쉬는 시간에 비를 피하며 처마 밑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던 학생들에게 이시형은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이제 그만두자, 안 되는 일이다, 라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당시의 학생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느끼기에도 학교는 이런 형편이고 앞날이 없으며 오직 이시형의 ‘외고집’으로 버티고 있던 터였다. 그 때 함께 비를 피하며 스승의 말을 듣고 있던 학생들 몇 명이 이렇게 말했다. 안 되어요, 선생님! 선생님이 그만 두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이 그만 두시면 해운입국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 말을 옆에 있던 손태현이 듣고 있었지만 그는 말없이 허공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손태현은 1948년 가을 졸업 후, 교수요원으로 남아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시형은 당시에 왜 그처럼 국립해양대학의 존속을 고집하며 고통과 고난을 견디고 있었던가, 라는 의문점이 든다. 사실 이시형은 학장직을 내려놓고 다른 직업을 찾아갈 수도 있었다. 해운계 교육기관으로는 최고의 명문을 나왔고 해기사로서 최고의 기능을 소유하였으며 아직 젊은 이시형은 마음만 먹으면 외양 화물선의 기관장으로 얼마든지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학교는 영영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 이시형과 주변 사람들의 판단이었다. 당시 해양대학 학장직은 월급이 박했고, 더더구나 학교의 현재의 형편은 물론 앞날도 매우 어두웠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훗날 그의 생전에 해양대학이 정상 궤도에 올랐을 때, 해운계 인사 초청 좌담회 같은 모임에서 그가 남긴 말이 있다. 누군가 어떻게 그 어려운 시간들을 견뎌 낼 수 있었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대답하길 제가 무슨 능력이 있나요, 다들 주변에서 도와주어서 할 수 있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스스로의 공에 대해서 교만하지 않으려는 그의 성품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학교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2년여의 군산 시절을 제외하고는 늘 폐교 위기 속에서 견뎌 온 한국해양대학,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이시형이 있었다. 그는 교육자이지만 스스로도 고백하였 듯이 교육자적 자질이 부족하여 고상한 교육자가 되기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참으로 교육자였다. 시대는 전혀 교육자가 아닌 자를 교육자의 길을 가라고 사명을 맡겼다. 그게 해운계의 이시형이었다. 전쟁 중에 교직원은 떠나가고, 학생들은 흩어지고 모이길 반복하면서 교실은커녕 사무실도 제대로 없고, 그런 상태에서 남은 몇몇의 교수진을 이끌고 학생들을 지휘해간 이시형. 어쩌면 학생들에게 스승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막역한 동지였다. 실제로 그들은 뜨거운 동지애로 폐교의 위기를 견뎌 나갔다.

전쟁 당시 국립해양대학 공동체의 뜨거운 동지애는 이시형이 설파한 ‘해운입국’ 정신에 기반한다. 이시형의 해운입국 정신, 손태현 식으로 말하면 ‘우리의 각오는 바다의 매골’, 그 해양사상의 형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항일독립사상이 투철했던 이시형은 일본에서 해기유학을 하면서 일본이 해양국가가 되어 간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일본이 해양국가를 지향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이다. 문명개화에 눈을 뜨고 사회 전반에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일본은 근대 국가, 식민제국주의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해양활동이 필수임을 깨닫게 되고 이를 위하여 해군과 해운 즉, 해양력의 강화에 집중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그러한 해양 인력들에 대한 해양사상 교육, 해양의식 고취 활동도 필수적으로 따랐다. 졸업 후 이시형은 조선총독부가 감독하는 조선우선의 선박에 기관사로 승선하여 연근해 항로를 오갔고,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면서는 남방항로에도 다니면서 해양국가 일본의 민낯을 속속들이 경험했다. 그는 바다를 통해 대륙 간 엄청난 물류 이동이 진행되는 것을 경험했고 잠수함 공격을 받아 물속으로 가라앉는 수송선을 지켜보면서 해양국가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는 무수한 날 동안 바다에서 파도에 시달리면서, 비바람에 젖으면서, 안개 속을 헤매면서, 저 깊은 곳 기관실에서 기계를 다루면서, 낮의 태양과 밤의 천체들을 바라보면서 다가올 신생조국이 맞게 될 해운입국의 꿈을 꾸었다. 그에게 해운입국의 이념은 전 생애를 관통하는 철학이며 신조였다.

전쟁이 아직 끝날 조짐이 없고 학교의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기만 하던 이 시기에 국립해양대학의 2번째 ‘해양의식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학생들은 입학식이나 졸업식, 그리고 정례적인 전체 모임에서 ‘닻 열 짓기’를 했다. 그것은 제복을 입은 학생 40여 명이 열을 지어 닻 형상을 만들었는데, 이 행사의 취지는 묘박지의 해저에 꽉 박힌 닻처럼 학교도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내자는 의미를 표현하는 데에 있었다.

한국 해기교육을 위한 국립해양대학의 기나긴 항해가 해운계에 알려지고 있었다. 한국 해운건설의 개척자들과 해운 행정 기업 실무자들이 학교의 앞날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걱정하는 말들이 있었지만 뾰족한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ICA(미국국제협력기구)의 실무자가 전쟁피해국 한국의 국립해양대학이 교사가 없어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직접 전달한 이는 이 학교의 2기 졸업생 장길상이었고, 교사 건립을 위한 재정 지원을 얻는 데는 당시의 해운국장 황부길의 역할이 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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