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이젠 벗어나자!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이젠 벗어나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1.07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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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에서 “선사 시대 문화발전 과정을 도구의 변천을 중심으로 파악”하도록 지침을 내림에 따라 모든 교과서에서 선사 시대를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 뒤에 이어지는 고조선의 성립, 삼국의 건국, 백제의 전성기 등과는 시대 구분 기준이 완전히 달라 연결되는 사회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고고학에서 발굴된 돌연장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면, 그 당시의 우리 선조들을 인류 공동체도 형성하지 못한 ‘미개인’ 취급하는 꼴이니 조상을 욕보이는 것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만든 시대구분법일 수도 있다. 일본의 굴레를 벗어나는 관점의 전환이 그래서 필요하다.

현재의 역사교과서에서는 선사시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옮겨 다니면서 생활했고’, ‘뗀석기를 사용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씨족들이 한 곳에 모여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간석기와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씨족 공동체가 모여 부족 사회를 형성했다.’ -청동기 시대에는 ‘족장이 출현하고’, ‘마침내 나라를 세웠다.’, ‘단군이 주변 부족이나 족장 사회를 통합하여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했다.’

즉, 선사시대의 경우 구석기·신석기·청동기 등 사람이 사용하는 연장의 질로 시대를 구분하고, 그 속에서 씨족사회, 부족사회, 국가사회라고 하는 인류사회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으며, 그 뒤에는 국가사회인 고조선이라는 인류사회의 모습으로 시대 명칭을 기술함으로써 주객이 전도되어 있다.

역사의 주체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이나 그들이 만든 공동체의 모습으로 시대를 구분하고, 그 시대에 사람들이 구석기나 신석기, 토기, 청동기를 사용했으며, 정치·경제·문화생활은 어떠했다고 기술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며, 그 이후의 시대 명칭과도 일관성이 있게 된다.

그렇게 하려면, 구석기·신석기·청동기와 인류사회 발전단계설의 무리-마을-고을-국가사회, 그리고 『삼국유사』의 단군사화에 나오는 환인의 환국, 환웅의 신시, 단군왕검의 고조선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이냐가 중요하다. 윤내현 교수는 환국을 무리사회, 신시를 마을사회, 환웅과 웅녀의 결합시대를 고을나라 사회, 고조선을 국가사회 시대로 보았다.

그러나 인류사회 발전단계에서 보면, 무리사회는 씨족단위로 이동하는 시대로 구석기를 사용했고, 1만 년 전쯤에는 정착생활을 시작한 마을[부족]사회가 되어 신석기와 토기를 사용했으며, 6천 년쯤 전에는 신석기 후기로 지도자가 출현하는 고을나라[부족연맹] 사회로 발전한 후, 4천500년쯤 전에 청동기를 사용하는 국가사회가 되었다고 한다. 『환단고기』에서 환인의 ‘환국’이 서기전 7197년, 신시는 서기전 3898년, 고조선은 서기전 2333년에 세워졌다고 나오므로 인류사회 발전단계설이나 고고학적 연장의 질 변화 연대와 맞추어 보면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혹 ‘환국’이라고 하니 국가사회였던 것처럼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역사기록에서 보면, 국가사회 시대에는 고조선, 신라, 고려 등 뒤에 ‘국(國)’자를 붙이지 않고, ‘마한에 50개의 소국이 있었다’는 등 ‘소국’에만 ‘국’자를 붙였다. 이 소국을 부족사회로 보면 앞에 대비한 내용과 연대적으로도 맞게 된다.

따라서 고고학적 연장의 질과 인류사회발전단계설, 그리고 단군사화의 인류 공동체를 연대적으로 비교해 볼 때 무리사회는 신화시대, 마을[부족]사회는 환인의 환국, 고을사회는 환웅의 신시, 국가사회는 치우천왕의 청구시대 또는 단군왕검의 고조선 시대라고 볼 수 있으므로 정부와 역사학계에서 선사시대 시대구분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있기를 기대한다.

<박정학 역사학박사 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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