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22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22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1.0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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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양항해 실습 중 상하이에 정박한 실습선에서 1기생 학생들의 모습(1947년). 부두에 정박한 선박들과 시가지를 배경으로 서 있는 학생들의 다양한 포즈가 이채롭다.
원양항해 실습 중 상하이에 정박한 실습선에서 1기생 학생들의 모습(1947년). 부두에 정박한 선박들과 시가지를 배경으로 서 있는 학생들의 다양한 포즈가 이채롭다.

 

그들은 모두 학교를 위하여 한국 해운입국을 위하여 그리고 바다에서의 자신의 꿈을 위하여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신념에 불타고 있었다. 1기생이 2년 반 만에 조기졸업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해방 후 한반도의 복구를 위하여 미국은 원조물자를 제공하기로 했고, 그것을 실어 나를 수송 선박 10여 척을 한국에게 무상원조해 주었는데 당장에 선박을 운항할 해기사가 많이 부족했다. 이에 미군정의 통위부는 해양대학 측과 협의하여 1기생을 조기 졸업시키기로 결정하였고, 결국 1기생들은 4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2년 반만에 학교를 졸업했다.



이러한 해양대학의 비정상적인 학사운영에는 당시의 한국 사회 경제 실정과도 연관이 있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돌아가면서 남겨 놓고 간 산업시설(그들은 철수 시 가져 갈만한 것은 다 가져갔고 남은 것은 온전한 게 별로 없었다.)과 미국과 우방이 지원한 기계 또는 시설을 다룰 공학기사들이 턱없이 부족하여 해양대학 졸업자는(특히 기관과) 선박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수요가 긴급했던 것이다.



학교를 설립하고 처음으로 졸업생을 배출하고 나자 자신감을 얻은 이시형은 학과를 증설하여 기존 항해과와 기관과에 조선과를 더 두었다(이후 조선과는 6.25전쟁 중 3기생의 졸업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당시 해기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그 시대의 가장 앞서가는 과학기술을 이 분야에서 가장 실력자인 교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학교의 교무행정은 안정되었고, 특히 이 당시에 신상초와 같은 뛰어난 인문학자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학생들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는 국제법과 해양법 등의 과목을 담당했는데 그의 강의에는 세계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곧잘 이야기되곤 했고 학생들은 그에 따라 인문적인 사고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이 시기에 학생들의 교양의 수준을 한층 더 높여 준 것은 독립애국지사들의 초청강연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국가 성립 과정이어서 일제 치하에서 국내외에서 활동한 독립지사들이 일반 민중을 계도하기 위하여, 학교마다 그 분들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갖곤 했다. 이 때 독립지사들이 전해주는 생생한 독립운동 이야기는 많은 감동을 주었고, 향후 한국 해운과 해기를 떠맡을 학생들의 국가관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군산에서 ‘국립해양대학’이라는 항해선은 그야말로 순풍을 받으면서, 승무원들은 충분한 영양공급으로 건강을 되찾았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제각각 앞날을 꿈꾸며 희망으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향료를 얻기 위하여 서쪽으로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 남아메리카의 남방으로 끝없이 항진하다가 드디어 만난 수로(훗날 마젤란해협이라 명명되었다)를 통과하여 들어서게 된 아무도 간 적이 없는 바다, 그 망망하고 평화롭기만 한 태평양에 들어선 마젤란 선대의 항해처럼 ‘푸른 희망’ 그 자체였다. 그렇다. 일기는 그지없이 맑고 먹을 것은 잘 준비되어 있고 승무원들은 세상 끝까지라도 함께 갈 만큼 사기는 충만하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우리가 도달할 꿈의 항구는 드디어 보게 될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희망이 충만했던 것 같다. 광복 후 사회 전체가 경제적으로 많이 나빴지만, 군산시는 버스교통비 등에 교육세를 징수하여 국립해양대학의 재정에 어려움이 없게 했다. 군산의 해양대학은 활기에 넘쳤다. 학생들은 아침 일찍 기상하여 해대학훈 5개조를 암송하며 단체가요 ‘해대요가’를 부르며 신체훈련과 집단구보를 했고, 아침식사를 하고 각자의 맡은 구역을 청소하고 나서는 줄지어 질서정연하게 학관을 향했다. 그리고 오전수업과 점심식사, 오후수업을 마치면 다시 신체단련이나 군사훈련, 집단구보 등을 했고 저녁식사 후에는 자율학습이나 각자의 취미대로 연극부, 음악부, 문학부 등의 동아리활동을 했다. 주말이면 외출이 허락되어 군산 시내에서는 검은 제복 하얀 모자 하얀 와이셔츠 넥타이를 한 단정한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는데 군산시민들은 이러한 주말 시내풍경을 좋아했다. 확실히 이대로라면 국립해양대학은 이 지역에 터전을 굳게 잡고 멀리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의 침로를 잡아나갈 것이 분명했다.



안정된 학사운영, 뛰어난 해기인재들과 교수진, 학교교칙과 내무규칙도 완성되었고, 교지이며 해양문예지이기도 한 ‘바다지’의 발행과 해양축제 적도제와 같은 교내문화와 해양문화 형성을 진행해 가고 있었고, 훗날 선박사관 양성 교육기관에서만 볼 수 있는 선후배간 위계질서도 확립되어 갔고, 실습선이 없었지만 당시의 유일한 해운기업인 조선우선의 협조를 받아 단체실습을 할 수 있었고, 이렇게 해양대학은 운영되어 갔는데 아쉬운 점은 조기 졸업시킨 1기생 이후에는 현직 취업이 불투명한 것이다. 당시 한국 해운은 자력으로는 선대확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활동상으로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중에 한국 해운의 도약에 따라 현장의 해기사 전체가 전율 공명한 ‘바다에 매골’이라는 해양사상의 정립이었다. 그것의 과정은 외형상으로 보면 손태현의 교훈과 이준수의 해대요가이겠지만 이시형을 중심으로 한 학교 공동체 모두가 동의하고, 공감하고, 함께 진행해 나간 ‘해양의식화 과정’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이 모든 것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의 꿈을 가져간 일이다. 전쟁은 이시형이 꾸던 꿈, 신순성이 꾸던 꿈, 황부길, 윤상송, 김용주, 홍순덕……, 그들 우리 해운건설의 아버지들이 꾸던 꿈, 그리고 지금 학교에서 바다의 매골을 각오하고 있던 국립해양대학생들의 꿈을 앗아갔다. 꿈이 없는 인간, 미래가 없는 사회, 이것이 당시 전쟁을 당한 우리들의 상황이었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며칠 후 실습을 떠났던 단양호가 돌아왔다. 이재송 선장의 단양호는 서해에서 실습항해 중 전쟁 발발에 따른 선박과 선원동원령에 따라 해군본부의 작전명령을 받고 인천항에 정박 중이었는데, 부두에 공산군이 진입해 들어오자 인천항 갑문 개폐 직원이 도피하고 없어 학생 특공대가 손으로 직접 갑문을 열고 탈출에 성공, 모항인 군산으로 무사히 귀항한 것이다. 학생들과 그들을 인솔한 교직원들이 학교로 돌아왔고, 이시형은 실습선 선장이며 책임자인 이재송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두 사람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논의했다(이때 이재송은 해양대학의 부학장 직임을 맡고 있었다).



일단은 교직원들과 학생들을 보다 안전한 부산 근역으로 이동시킬 것을 결정했다. 그러고 나서 이시형은 홀로 주거하고 있는 관사에 남아 사태를 관망했다. 하루, 이틀, 사흘…….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전황은 긴박해지고 있었다. 남한의 상당 부분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이제 곧 적은 군산도 집어삼킬 것이었다. 이시형은 깊은 고뇌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무도 없이 텅 빈 학교,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부산에서 쫓겨나서 인천에 있을 적, 교사 건물이 없게 되면 학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뼈저린 경험, 그 악몽이 이시형을 짓누르고 있었다. 포성이 군산 근방에서 들리게 되자 그 때까지 함께 남아 있던 학생 몇 명이 이시형을 재촉했다. 이시형은 그들과 함께 군산 부두 선착장에 계류되어 있던 YMS(소형목조선, 부족한 대로 학생들 실습에 사용했다)에 올랐다. 그리고 부산으로 이동하여 당시 대한조선공사(지금의 한진중공업의 전신) 도크 안벽에 계선했다.



이후 이시형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6.25전쟁 중에 국립해양대학이 폐교되지 않은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외부의 별 특별한 도움 없이 이시형과 몇 명의 교직원과 이합집산하는 수십 명의 학생들만으로, 이리저리 떠돌면서, 그래도 학교는 존재했다.



부산으로 피난한 이시형은 조선공사의 도크에 계선한 YMS에 학생들을 모아 학사를 진행하려 노력했다(아마 정상적인 수업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시형은 여기서 4학년 조선과 학생들의 졸업시험을 시행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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