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간다
기차는 간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2.30 22: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개가 자욱하다. 낯선 어느 곳에 발을 디딘 첫 풍경은 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 곳이 오랜 시간 마음에 두었던 곳이라면 두근거림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은밀한 첫인상. 안개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차창 밖으로 스치는 들판 위로 사열한 나무들의 묘한 운치가 설렘을 더한다. “무슨 나무일까요?” 일행 중의 한 분이 묻자 누군가 자작나무라고 했다. 아, 자작나무라니! 40도가 넘지 않으면 술이 아니고 4천km를 가지 못하면 기차가 아니며, 영하 40도 아래가 아니면 춥다 말라던 러시아에 내가 온 것인가. 백년도 채 지나지 않은 우리들의 아픈 역사 속에 한 페이지로 장식된 그림 속,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던 가깝고도 먼 나라의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정복”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이다.

태평양 진출을 위한 군항으로 개항한 도시이지만 혁명과 전쟁은 안개에 점령당해 꽤 낭만적인 첫인사를 건넨다. 그런 가려진 인사의 한 편에는 아픔도 있다.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러시아에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선조들의 발자취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200년 전쯤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이후로도 이민은 계속되었는데, 거의가 농업이민이었으나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 이민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른바 대숙청 당시 연해지방의 한인들은 여러 소수민족들과 함께 가혹한 분리·차별정책에 휘말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척박한 낯선 나라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가던 사람들, 가족들과 여행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좋아하던 아이들부터 18만명의 고려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기차를 탔다고 한다. 그것도 사람이 탈 수 있는 열차가 아닌 짐을 실어 나르던 화물차라 창문조차 없어 무려 만명이 넘는 죽은 사람들의 시체와 오물들이 가득한 채 무려 50일을 달린 기차는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사람들을 내려놓았다. 물론 생명력이 강한 고려인들은 지금까지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에서 가장 잘 사는 소수민족이라 하니 그 아픔이 조금 가시는 듯하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를 둘러보고 옛 한인촌이 있는 아르바트 거리를 산책했다. 해양공원으로 이어진 거리는 깨끗하고 멋스럽다. 관광객들이 많아져 한국의 명동이라고 불리는 곳, 무리를 지어 날아오르는 비둘기 떼들이 평화롭기만 하다. 거리를 산책하다 술 그림이 유혹하는 바(bar)로 들어섰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끝에 인상이 조금 험해 보이는 러시아 남성이 고개를 까닥하며 들어오라는 몸짓을 한다. 친근한 팝송이 흐른다. 얼굴이 주먹만한 무표정한 아가씨에게 흑맥주 한 잔을 시켰다. 영화 탓일까 퀸의 오리지널 골든 음반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고 여러 유명한 팝가수들의 뮤직 영상이 배경으로 흐른다.

공산주의가 해체된 지 겨우 이십 년이라는 것이 러시아 사람들의 표정에서 아직 웃음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들의 사회는 많은 벽이 허물어졌고 자유스러움이 흠뻑 묻어난다. 전쟁과 혁명, 두 단어는 역사 속에서 지울 수 없고 무를 수 없는 참혹이지만 그 속에서 아름다운 음악과 문학, 사랑과 낭만이 탄생되었다.

‘돌아본다’라는 말은 12월 겨울 끝자락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아닐까.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상처는 보듬어 살펴주어야 하고 품어야할 기억은 새기면서 이어가고 싶다. 모든 끊어진 것들은 시간이 필요할 뿐 언젠가는 하나로 이어지리니.

며칠 전 신의주에서 남북 철도 연결 착공식이 열렸다. 첫 삽을 뜨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지만 단절되었던 서로의 마음이 다시 이어진다는 상징성으로는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내가 사는 이곳에서도 북한을 지나 하얼빈, 몽골을 거쳐 유럽까지 이어질 것이다.

다시,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9천288km를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기다린다. 매서운 바람에 코트 깃을 세우고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기다리는 사람들, 2018의 무수한 사연을 싣고 기차는 처음이자 마지막 역에 잠시 머물렀다. 한껏 움츠린 저마다의 가슴에 많은 희망의 말들을 안고 새 해로 가는 기차를 타는 사람들. 자, 다시 여행은 시작되고 기차는 간다.

최영실 여행수필가·무용가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