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년 끝자락에 되새겨보는 이름
무술년 끝자락에 되새겨보는 이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2.26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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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어느 따스한 봄날에 고마운 분이 다녀갔다. 우리말의 어원과 그 속에 담긴 얼과 정에 대해 널리 설파하신 경희대학교 故 서정범 교수로부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배운 조현용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폭넓은 교류와 연구를 하는 대학선배 연구실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먼 울산까지 찾아온 것이다. 조 교수의 첫 이야기는 “이름은 듣고 싶어 하는 대로 불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옛 소련의 일부였다가 독립한 ‘Georgia’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 러시아식 발음은 ‘그루지야’지만 정작 Georgia 사람들은 ‘조지아’로 불리길 원했다고 한다. 한때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소련의 최고 권력자였던 스탈린이 조지아 출신이었다는 것도, 강철이라는 의미를 지닌 스탈린을 가명으로 사용하다 본명으로 사용하게 된 것도 이런 인연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찌되었건 이름도 문화의 일부인 만큼 듣는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대로 불러주는 것이 좋을 성싶다. 그러므로 처음 누군가를 만난다면 “뭐라고 불러드릴까요?”라고 묻는 것이 예의이자 바른 자세라고 생각한다. 남성은 성으로 불리기를 원하고, 여성은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서 살펴보면 ‘어이, 학생, 삼촌, 아저씨, 아줌마, 아가씨, 이모’와 같은 단어들을 남발하는 것 같다. 호칭을 어떻게 할지 물어보기가 애매해서 그냥 사용하는 탓에 단지 듣는 사람들이 기분 나쁘지 않게 반응한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 같다. 바쁜 세상에서 굳이 그걸 따져 무엇하랴마는 늘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필자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개띠 선수들의 선전을 주문한 적이 있다. 필자의 그런 어처구니없는 주문에도 우리 코칭스태프와 국가대표 선수들은 멋들어지게 응답해 주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는 “2018년에는 제대로 된 나의 모습과 목표에 대한 결실을 찾아내라”고 주문했고 아직도 그 주문에 응답하고 있다. “바라던 만큼 마음속에서 듣고 싶어 하던 것을 실천으로 들려주고 있을까”라고 자문도 하지만 아직 실망하거나 원망할 수준은 아니어서 계속 정진해야함을 또 확인한다. 아니 해가 바뀌어도 이 자문은 계속되리란 걸 잘 알고 있다.

필자가 얼마 전 즐겨 본 미국 드라마가 있다. 미국 로펌 변호사들 이야기를 다룬 ‘Suits’다. 2011년 시즌 1부터 올해 시즌 8까지 제작되었으니 미국에서의 인기도 꽤 컸으리라 짐작된다. 하버드대를 나온 변호사들만 채용하는 그곳에서는 주인공들이 정장(suits)을 입고 각종 소송(suits)를 다루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인생사를 살펴보는 재미가 연말에 늘 받게 되는 스트레스를 풀기에는 딱 맞는 것 같아 즐겨 보고 있다.

시즌 3에서인가 남자 주인공 둘이 나눈 대사가 맘에 와 닿았다. 곤란한 부탁을 하는 변호사 친구에게 “우리가 친구라고 했잖아. 친구라면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아”라며 대응하는 변호사. 하지만 부탁을 한 친구 변호사는 “친구라면 자네가 싫다고 해도 결코 원망하지 않을 거야”라며 응답한다. 돈과 승리만을 뒤쫓을 것 같은 삭막함과 비정함 속에서도 친구의 의미를 뒤돌아보게 만드는 좋은 대화였다. 쉽사리 말로 꺼내지 못할 어려운 부탁을 거절당했을 때에도 ‘친구가 듣고 싶어 하는 방식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쿨 하게 인정하는 모습.

비단 친구지간뿐만 아니라 모든 대인관계에서 꼭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오늘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는 공자 말씀을 슬그머니 바꾸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공자의 ‘인무원려(人無遠慮) 필유근우(必有近憂)’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멀리까지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가까운 날에 근심이 생길 것이다”라는 진리가….

<공영민 울산대 첨단소재부 교수산업대학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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