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21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21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2.25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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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선 ‘빌리 호’ 1등항해사 이준수의 모습(1950년대로 추정됨). 학생 시절 그는 은사인 이시형과, 마찬가지로 학생(1기생 동기)이었던 손태현과 함께 훗날 한국 해기인력이 한국 해운을 일으켜 세우는 데에 정신적 원동력이 된 ‘바다에 매골’이라는 해양사상을 전개해 나갔다. 이준수와 손태현은 모교의 교수, 학장을 지내면서 학교와 한국해운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화물선 ‘빌리 호’ 1등항해사 이준수의 모습(1950년대로 추정됨). 학생 시절 그는 은사인 이시형과, 마찬가지로 학생(1기생 동기)이었던 손태현과 함께 훗날 한국 해기인력이 한국 해운을 일으켜 세우는 데에 정신적 원동력이 된 ‘바다에 매골’이라는 해양사상을 전개해 나갔다. 이준수와 손태현은 모교의 교수, 학장을 지내면서 학교와 한국해운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적산가옥은 옹색한 대로 숙소는 되었으나 문제는 강의실이었다. 교사를 구하기 위하여 인천 시장과 지역 유지들을 만나는 등 백방으로 뛰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에 학생들을 근방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찾아다니게 하여 강의실을 구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찾아다니는 학교에서는 교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교문에 ‘진해해양대학 이전 결사반대’라는 현수막까지 걸고 반대를 하고 있었다. 차츰차츰 교수진들이 이직하고 학생들도 떨어져 나갔다. 이시형에게 매우 외로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천해양대학의 선례에서 보 듯 학교가 교사를 마련할 수 없는 시련을 겪는 상황에서는 직임을 맡은 책임자가 떠나가면 학생들도 이산하여 폐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때 어떤 학생이 스승 이시형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학생의 이름은 김주년, 당시 1학년생이었다.

그는 학장 이시형에게 자기 집이 군산에 있는데 전번 방학 중에 집에 갔을 적, 군산시에서 해양대학이 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시형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학생 김주년과 그의 동기생 김경천을 군산으로 파견 보내었다. 아는 지인의 소개로 군산시청 관계자들을 만난 김주년 일행은 군산시가 해양대학의 군산으로의 이전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이시형 학장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해양대학의 군산 이전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군산 시청에서 지역의 유지들과 군산시 교육위원회 위원들과 해양대학 대표가 만나 교사 신축과 학교 운영에 소요되는 경비 제반 관계에 대하여 논의를 하고 서로 간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1947년 5월에 군산초등학교 별관과 대성동 3번지의 미곡창고로 학교를 이전하고 학교명을 ‘국립해양대학’으로 개명했다. 너무 서둘러 이전했기 때문에 아직 수업할 교실을 구하지 못한 상태여서 우선 인근 초등학교의 교실을 빌려 사용했고, 학생들의 기숙 문제는 군산에 산재하는 여관을 빌려 군산시가 하숙비를 부담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 뒤 1948년 1월 20일에 군산시가 약속한 대로 신창동에 신교사가 준공됨으로써 학교는 제대로 된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군산에 정착한 국립해양대학은 군산시민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별다른 고등교육기관이 없던 차에 대학이 들어섰고, 또 이 대학의 학생들은 단정하게 제복을 입었고 절도 있게 행동했기 때문에 군산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국립해양대학은 군산에 있으면서 학교의 관할권이 통위부(현 국방부)로 이관되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준 군인 신분으로 대우 받았고 그에 따라 해안경비대의 사관후보생에 준하여 군복과 급식이 이루어졌으며 어려운 사회환경이었지만 비교적 여유 있는 보급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해안경비대에서는 배속장교를 파견하여 학생들에게 사관후보생에 준하는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이 학교에서 이러한 군사훈련은 이후 매우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군산 시절에 국립해양대학은 비교적 안정된 학사 운영을 해 나갔다. 비록 충분치는 않았지만 학사를 진행할 사무실과 교실과 학생들의 기숙사가 있었고 군산시와 정부(미군정 때는 미군정청)의 재정 지원으로 예산을 운영해 나갔고 그에 따라 교직원들과 학생들의 생활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 시기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랬지만 해양대학의 입학생들은 전국적으로 매우 뛰어난 성적의 소유자들이었다. 이것은 당시 한국 사회가 매우 빈곤한 시대였고 학교가 국비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학생들을 가르친 전문교과 교수들은 비록 교육학을 연구한 적은 없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뛰어난 과학 지식의 소유자들이었다. 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학장 이시형은 교수 영입에 각별히 신경을 썼는데 이 때 문인 신상초와 국내 유일의 조선학자 김재근이 교수진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모두 학장 이시형의 해운입국 정신과 해기교육을 사랑하는 진정성에 감동을 받고 들어왔다.

학교가 전 부문에 걸쳐 안정을 찾고 학교의 발전에 헌신적인 학장과 뛰어난 능력의 교수진의 지도를 받으면서 학생들은 향후 이 학교의 전통이 될 여러 가지 학교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연극부, 음악부, 문학부…… 등의 동아리가 결성되었고, 해양 의식(儀式) 또는 해양문화를 표방한 해양축제 ‘적도제’가 이 때 시작되었고, 처음으로 교지가 발간되어 제호를 ‘바다지’라 명명했는데 이 때 발간된 바다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문예지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해양대학만의 전통이랄 수 있는 학교 문화가 상당 부분 이 때에 생겨났다.

당시 학교 역사의 초창기에 학생들은 스스로 전통과 학교 문화의 창조자였다. 그들은 학사 운영에도 의견을 내었고, 학생 생활 문제에 있어서는 자치권을 부여받아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정기 및 임시 자치회를 개최하여 뜨겁게 토론하고 논쟁했다. 그런데 이 자치회에서는 향후 해양대학의 해양정신이 되고 한국 해기사들의 실천적 사상이 될 어떤 주제가 등장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20세, 21세 청년들이 아직 바다를 경험한 적이 없는 그들이 매우 실천적인 해양사상을 들고 나온 것이다. 어느 날 자치회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군가 크게 “바다에 죽자!”라고 외쳤다. 그 말이 있은 후 회의는 매우 쉽게 결말이 났다. 그는 2학년 손태현 학생이었다.

손태현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교사를 군산으로 이동하고 이듬해에 학장 이시형은 교직원과 학생들 대상으로 학교의 사상과 이념이 될 교훈을 공모했다. 여기에 손태현의 작품이 당선되었다.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조 우리의 이상은 인격의 완성

제2조 우리의 생활은 진리의 탐구

제3조 우리의 사명은 칠대양 제패

제4조 우리의 각오는 바다에 매골

제5조 우리의 학원은 명랑한 가정

이로써 해양대학에 해양사상, 그 이념화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손태현의 학훈은 교내 행사 때마다 외쳐졌고 군사훈련 때도 정신교육으로 암송되었다. 제4조 바다의 매골, 이 이상의 해양정신이 또 있겠는가? 해양사적으로 해양의식화에 사용된 표어의 예를 하나 들면 대항해 시대에 말해지던 포르투갈의 것을 들 수 있다. 그것은 “항해는 필연, 삶은 우연”이란 표어이다. 어느 것이고 간에 그러한 해양국가들의 해양표어에는 바다에 삶의 전부를 건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해양대학 학생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해양사상의 발로는 비단 손태현 개인에 한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시형은 또 교내에 학생들이 부를 ‘단체가요’를 공모했는데 2학년 이준수의 작품 ‘해대요가’가 당선되었다. 그것은 1절부터 10절까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8절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웅지를 못 이루면 귀향 안 하리

부모의 슬하도 그리웁건만

천부의 사명은 더욱 크도다.

우리의 고향은 태평양이요,

우리의 무덤이 될 태평양이다

우리의 무덤은 태평양, 손태현의 ‘바다에 매골’과 일치하지 않는가! 해양대학 학생들은 수업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주당 몇 시간은 군사훈련, 매일 승선생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 때 이렇게 해대요가가 떼창으로 불리어지고 있었고 한국 해운 건설 초창기 우리들의 사랑하는 해운 역군들은 이렇게 의식화 되어 가고 있었다. 학장 이시형이 학생들에게 훈시를 하면서 얼마나 ‘우리의 각오는 바다에 매골’을 설파했는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1947년 10월에 이시형은 1기생 70명이 실습 승선한 ‘KBM 2호’에 연습감으로 승선했다(당시 이시형은 일시 해양대학장 직에서 이임했다. 해양대학의 초창기 10년 동안에 이시형은 학교의 진로와 발전을 위하여 학장직에 취임, 이임을 반복했다). 한국 해운 사상 처음으로 외양항해에 나선 실습선은 서해의 황파를 넘어 중국 상하이에 입항했는데 아직 환국하지 못한 교포들과 이름만 들어도 알 독립지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1948년 2월, 마침내 국립해양대학 1기생이 졸업했다. 그 동안 개교부터 지금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고난을 참아 온 이시형과 교직원들은 뜨거운 감회에 젖었고, 1기생 학생들의 기쁨도 더할 나위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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