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이 끊어질 위기의 '병영 은장도'
맥이 끊어질 위기의 '병영 은장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2.18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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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서 은장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엽부터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울산 병영성에서는 군사들이 쓰는 칼이나 창 등을 만들어냈으나 대원군이 이를 폐지하는 바람에 장인들은 은장도를 만드는 것으로 생업을 유지했다. 왜정 초기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72개소의 칼방에 350여명의 장인이 있었다. 패도(佩刀, 노리개로 차는 장도)는 ‘칼쇠’로 불리는 강철을 불에 달궈 때리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수백 번을 불에 달구고 때리고……. 이 같은 공정을 되풀이하면서 강한 칼이 만들어진다.” 

위의 글은 1979년 11월 15일자 중알일보 기사의 일부이다. <주문 생산으로 명맥 잇는 울산 은장도>라는 주제였는데, 전성기에는 마을 전체가 은장도 생산을 가업으로 삼고 만들어왔으나 이제는 두세 명만이 간간이 들어오는 주문에 맞춰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전했다. 이때 인터뷰 기사의 주인공이 은장도 기능보유자인 허균(50, 울산시 동동 243)이다. 아래 글은 ‘꼴딱대장’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가 남긴 말이다. “값싸고 보기 좋은 제품들이 많은데 비싸고 구하기 힘든 은장도가 번창하길 바란다는 것이 애당초 잘못 아니냐?”

그 후의 <병영 은장도>는 39년 동안 겨우 명맥만 이어왔다. 울산시가 무형문화재로 장도장 임원중을 지정했으나 사망했고, 그의 아들 임동훈이 전승자로 지정되어 맥을 잇고 있다. 또 다른 명인 장추남을 두 번째 무형문화재로 예고하고 있으나 고령인데다가 전수자가 없다. 최고 기술의 장도장인 허균의 아들 허명도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받은 명인이지만 지금은 건강을 잃어 작업이 불가하다. 진주의 임차출은 1987년에 경남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으나 사망했고, 지금은 아들 임장식이 ‘진주장도장전수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뿌리는 울산 병영이다. 

울산이 상무(尙武)의 고장이 된 것은 그 역사가 깊다. 신라시대부터 왜구의 출몰이 빈번해지자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무(武)를 숭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을 것이다. 조선조에는 울산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을 설치하여 458년간 존속하다가 1894년에 폐지되었다. 이렇듯 ‘경상좌병영’이 오랜 기간 존속되어온 만큼 창이나 칼 같은 무기 제조를 위해 지금의 병영에 금속 관련 장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병영 폐지 이후의 그곳은 다양한 금속 단조 기술의 전통이 담뱃대, 은장도, 가구 장석 등 생활용구를 만드는 공방으로 전환되었다.

이 중에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것이 <병영 은장도>이다. 한 뼘 이내의 작은 칼은 예전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던 생활용품이었다. 이런 칼에 정성스레 장식한 칼집을 만들면 ‘장도(粧刀)’가 된다. 이 장도의 칼집을 나무로 만들면 목장도가 되고, 은으로 만들면 은장도가 된다. 이것을 여인의 정절을 지키는 도구라고만 말하는 것은 인식 오류다. 장도는 정성이 극진하여 귀중품, 혼수품, 노리개 등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을 뿐이다. <병영 은장도> 칼집에는 ‘앉은 학, 용, 태극’ 같은 문양들이 새겨졌는데, 이는 울산 장도의 역사성과 굳센 의지를 담은 것이다.

<병영 은장도>가 마음속에 들어온 것은 지난 11월말이다. ‘울산학연구센터’가 주관한 ‘울산의 문화관광 상품화 전략’ 관련 세미나에 참석하면서부터이다. 두 가지의 주제발표 중 문화재청 전문위원이 발표한 <병영 은장도>를 중심으로 한 ‘울산지역 전통공예기술의 계승과 육성방안’에서 관심이 쏠린 것이다. 발표자는 그가 연구해본 결과 <병영 은장도>가 전국 최고 수준이었으나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무척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병영 은장도>는 어떻게 해서든 전승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은장도의 세대이음이 가장 잘된 곳은 광양이다. 광양에 국내 유일의 장도 전문 박물관이 2006년에 개관되었는데, 전수관도 겸하고 있다. 여기에는 장도장 박용기가 14세 때부터 62년 동안 만들어온 각종 장도가 전시되어 있다. 그 외 대한민국 명장들의 작품들과 세계 각국의 칼들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장도를 만드는 공구들과 작업실 광경이 재현되어 있으며, 체험학습 공간도 있다. 아버지 박용기에 이어 아들 박종군도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아 전수자들도 확보하고 있니, 이는 개인의 신념과 기관의 후원이 빚어낸 결과이다.

<병영 은장도>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은 가히 기적이다. 모진 가난을 무릅쓰고 가업을 잇고자 하는 장인의 의지 덕분이다. ‘구리와 금을 합금한 재료를 오래 묵힌 소변을 이용해 변색시켜서 만든 오동판에 문양을 조각해 은을 상감하는 최고도 수준의 <병영 은장도>는 울산의 자랑이다. 이 자랑거리가 복수의 장도장을 보유하고도 맥이 끊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 울산시가 서둘러 <병영 은장도> 전승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명인들의 기본 생계 보장은 물론 전수관을 겸한 합동공방과 전수자도 확보하여 은장도 본거지의 명성을 이어가야 한다.

이정호 수필가, 울산학포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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