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찾은 경주 양동마을
두 번째 찾은 경주 양동마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2.1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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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늦은 오전, 울산사람 4명을 태운 산타페가 경주 안강읍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1시간30분 남짓. ‘하마나’ 하고 기다리던 손옥희 선생(58, 안강여고 교사)이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다. 먼저 도착해 대기하던 배문석 국장(‘울산노동역사관 1987’ 사무국장)까지 5명 모두가 손 선생과는 초면이다. 손 선생은 안강에서 이름난 맛집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난생 두 번째인 경주양동마을 방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근 550년 가까이 사돈관계도 맺어가며 터줏대감 노릇을 해온 월성손씨(月城孫氏 또는 慶州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 또는 驪州李氏) 두 가문의 집성촌인 경주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전형’으로 손꼽히면서 2010년 7월 안동하회마을과 나란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이번 두 번째 방문은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 선생은 우리 일행을 위해 전문해설사 이수원 씨(69)를 따로 모셨다. 하지만 그의 길잡이 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리더 격인 이정호 선생(수필가, 교육자)이 그의 ‘진외이종6촌’ 손창준 전 포항고 교장을 그분 자택에서 만난 때문이었다. 이 선생은 ‘손 교장’이 병자호란 때 경기도 이천 ‘쌍령전투’에서 순절한 낙선당(樂善堂) 손종로(孫宗老) 가문의 종손이며, 자신과 손 교장은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장군의 외손들이라 했다. ‘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낙선당 손님방에서 다과 대접을 받은 것도 그 덕분이었다. 손창준 선생의 특별선물은 ’경주손씨 낙선당파 종중‘에서 펴낸 <낙선당과 단고사>란 서책. 대학시절 독일어를 전공한 손 선생이 부전공으로 한문을 선택한 이유를 알만도 했다.

오후 4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각, 해는 어느덧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손옥희 선생의 어머니 이경환 여사(84)가 사는 집은 초라해 보여도 마당이 넓어서 좋았다. 추운 날씨에도 팔순의 이 여사는 툇마루에서 손을 맞았다.

“여기까지 먼 길 오셨는데, 방으로 들어가입시더.” 하지만 때론 이해하기 힘든 말씀도 나왔다. ‘누군가의 감시’에 대한 의구심 같은 것은 아닐까? 이 여사는 연세를 묻는 말에 “난 모름더”라고 하거나 무슨 말 끝에 “이 손님뿐 아이라 저기 또 온 사람 있지 싶다”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일행이 자기소개를 하자 그제서야 이 여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여기 계시는 분, 다 울산서 오신 분들인교? (방에) 들어오소, 춥다.”

나중에 손옥희 선생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손 선생의 짧은 대답 속에는 이 여사의 일생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만 같았다. “저의 어머니는 평생 고생만 하셨어요. 시집오기 전에는 부모 없는 고충을 말없이 참아내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양동마을로 시집와서도 ‘빨갱이 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숨죽이며, 온몸으로 막으며, 죽고 살았습니다. 아직도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아버지 함자만 나와도 눈물을 흘리며 벌벌 떨기만 하십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이지요. 따뜻한 사랑 한 번 못 받고 커 오신 어머니, 자식들 공부시키시느라 죽도록 일만 하시고, 지금은 조금 편해야 하는 때에 치매로…. 근간에 좋은 일들을 다 잊으신 게 마음 아파요. 임 박사 논문도 있는데….”

‘임 박사 논문’이란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한국학과를 나온 임성욱 박사가 2015년 2월에 펴낸 박사학위논문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를 가리킨다. 이경환 여사의 부친은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다 즉결처분으로 생을 마감한 울산 입암마을 출신 ‘좌익독립운동가 이관술’ 선생을 말한다. 손옥희 선생은 이날 어머니 이경환 여사가 손수 서명한 임 박사의 논문집을 한 권씩 일행에게 나눠주었다. 이 여사는 전날 따님이 불러주는 대로 논문집 여백에 “이관술 망내(=막내딸)‘란 사인(sign)을 일일이 남겼다. 그 중엔 ’박중훈‘(=고헌 박상진 의사의 증손) ’김정주‘ ’강귀일‘이란 이름도 들어있었다.

<김정주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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