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백건우의 울산 연주
20년 전, 백건우의 울산 연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2.06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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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컬(cynical)하게 웃다’의 우리말은 어쩌면 ‘씨익 웃다’가 적절할지 모른다. 세상 살다 보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그런 처지에서 나오는 웃음이다.

고등학교 다니던 딸아이가 피아노를 전공한답시고 연습에 몰두할 때인 약 20년 전의 일화다. 딸아이는 어릴 적부터 ‘절대음감이란 것’을 조금은 타고난 모양인지 지도교사나 이웃 분들이 곧잘 칭찬을 해주곤 했다. 애비는 막걸리 집 젓가락 장단에 일가견을 가진 게 고작인데, 딸아이는 피아니스트가 목표라니…. 이 무슨 삼시랑에라도 잡혔나 해서 온 집안이 초비상이었다.

아파트 아래윗집도 시끄러운 피아노 연습 소리에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급기야는 딸아이더러 다니던 교회의 자투리 시간대에 매달리게 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부족한 연습시간에 안달이 난 딸아이는 눈덩이처럼 스트레스만 쌓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가 재능기부 성격의 지방순회공연 일정에 따라 울산으로 오게 된 것. 세계적 음악가라면 일부러라도 시간과 돈을 쪼개어 서울도 마다않고 달려갈 판에 이런 횡재라니….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딸아이와 아내를 위해 거금(?)을 쾌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부러 연주회가 시작된 지 반시간쯤 지나 공연장에 도착한 나는 잠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혹시나 하고 공연장 안으로 살짝 발을 들여놓는 순간 흠칫 놀랐다. 행사용 포스터도 입간판도 하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럴 수가. 혹시 잘못 들어왔나 싶어 계단 2층 옆문으로 살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백건우 씨는 다행히도 연주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북쪽 윙(West wing) 맨 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나 가까운지 연주자의 숨소리까지 귓전을 자극했다.

공연장 내부는 대충 이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대 중앙에는 피아노 1대와 연주자가 있었고, 관객은 1층 앞좌석 가운데에만 오밀조밀 몰려 있었다. 양쪽 윙의 객석과 2층은 텅 빈 공간뿐. 대낮같이 밝은 내부조명이 썰렁한 분위기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키는 듯했다. 백건우 씨의 연주에는 쉼표가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연주보다 엉뚱한 잡생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변이 일어났다. 연주자의 손이 건반 위를 뛰어다니는가 싶더니 이내 춤추듯 날아다니는 게 아닌가.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악보도 없이 내리 2시간 가까이 건반에만 매달리다니! 평생연습의 보람이거나 천부적 재능으로 입신의 경지에 오른 덕분이거나…. 감격은 일순 정신까지 혼미하게 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이 만든다고 했던가!

얼마 후 황당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내 생각에, 갑자기 뛰쳐나온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흥이 났는지 피아노 앞쪽에서 놀고 있었던 것. 나의 눈은 시종 고양이의 일거수일투족에 꽂혔다. ‘저놈이 무슨 기상천외한 일을 저지를까.’ 하지만 이놈은 얼마 안 있어 무대 뒤편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관객들이 이 장면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

이날 이후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은 ‘연주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100명도 채 못 되는 관객 앞에서 열정을 다 쏟은 세계적 피아니스트는 그 날, 울산의 초라한 문화수준에 몇 점의 점수를 주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우리 식구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어쨌든 딸아이가 음악이 아닌 간호학 전공으로 진로를 바꾼 것이 지금도 묘한 웃음 ‘씨익’으로 남아 있다.

박재준 NCN 위원·에이원공업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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