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자원으로서의 기독교 박해사
관광자원으로서의 기독교 박해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2.05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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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長崎)와 아마쿠사(天草) 지방의 잠복(潛伏) 기리시탄 관련유산’이 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잠복 기리시탄’이란 에도(江戶) 막부의 금교령(禁敎令)하에서 불교도로 가장해 신앙을 유지한 기독교인을 말한다.

일본에 기독교는 16세기에 들어왔다. 대항해시대를 맞아 포르투갈인 선교사들이 일본에 복음을 전한 것이다. 이 때 일본은 확고한 중앙권력이 없는 센코쿠(戰國)시대였다.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이 각축을 벌이던 시기였다.

약육강식의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던 다이묘들에게는 서양 상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문물을 흡수하려는 욕심이 있었다. 선교사들은 이런 다이묘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며 선교활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전달된 무기가 조총과 서양식 대포였다. 선교사들이 최신 무기 수입을 알선해준 셈이다.

이런 신무기를 효율적으로 활용한 세력이 결국은 일본의 천하를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권력을 형성하게 됐다. 그 주인공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秀臣吉)였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일본열도를 통일하자 기독교 선교는 위기를 맞게 된다. 도요토미는 지방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다.

도요토미에 이어 일본열도를 장악한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강력한 금교령을 내리고 기독교도 박멸(撲滅)을 시도했다.

기독교도들에게는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졌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곳곳에서 나왔다. 관리들은 기독교도를 찾아내기 위해 에후미(繪踏)라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주민들에게 성모상이 조각된 동판을 밟게 해 이를 주저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차마 성상을 밟지 못하고 순교의 길을 걷는 신자들이 속출했다. 강요에 못 이겨 성상을 밟은 신자들은 집에 돌아와 깨끗한 물에 신었던 신발을 씻고 그 물을 마시며 속죄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당시에도 막부의 기독교 탄압은 극악무도했다.

80℃가 넘는 온천에 빠뜨려 죽이는 사례도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 (遠藤周作)의 소설 ‘침묵(沈默)’에 잘 묘사돼 있다. 이 작품은 최근 ‘사일런스’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돼 상영됐다. 그러나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막부의 강력한 탄압에도 박멸되지 않았다. 관리들의 눈을 피해 신앙생활을 유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잠복 기리시탄’ 또는 ‘가쿠레기리시탄’이라고 한다. ‘가쿠레’는 ‘숨은’이라는 뜻이다.

나가사키현 전역과 구마모토(熊本)현 아마쿠사 지역에서는 일본에 선교가 다시 허락된 19세기 후반까지 신앙을 유지한 잠복 기리시탄들이 있었다. 약 250년간 사제가 없는 가운데 전승된 신앙은 토속신앙과 습합돼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변형되기도 했다. 다시 일본 땅에 들어온 사제들은 숨은 신자들을 발견했다며 바티칸에 보고했다. 전세계의 기독교인들도 경탄했다.

그러나 부끄러운 역사는 숨기고 가르치지 않는 일본인들은 야만적인 기독교인 박해의 역사를 외면해왔다. 그래서 일반적인 일본인들은 잘 모르는 역사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 역사와 유적이 관광자원으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봤다. 그래서 관련 유산을 정비하고 정리해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관광자원의 발굴과 활용의 모범사례라 할 수 있겠다. 천주교인 박해시대의 유산이 울산 지역에도 적지 않다. 활용 방안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강귀일취재1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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