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8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8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2.04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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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태평양으로 출항하는 고려호와 부두 풍경. 고려호는 태평양전쟁 시 부산항 앞바다에 침몰한 화물선을 인양, 수리한 선박으로 광복 후 최초로 태평양을 건넌 화물선인데 승선 해기사는 대부분 해군함정 승무 장교들이었다. 이 항해 중 고려호는 폭풍이 잦은 북태평양 겨울바다에서 기관고장을 일으켜 위기를 겪었지만 잘 극복하고 무사히 미국 서부 포틀랜드에 도착했다.
전쟁 중 태평양으로 출항하는 고려호와 부두 풍경. 고려호는 태평양전쟁 시 부산항 앞바다에 침몰한 화물선을 인양, 수리한 선박으로 광복 후 최초로 태평양을 건넌 화물선인데 승선 해기사는 대부분 해군함정 승무 장교들이었다. 이 항해 중 고려호는 폭풍이 잦은 북태평양 겨울바다에서 기관고장을 일으켜 위기를 겪었지만 잘 극복하고 무사히 미국 서부 포틀랜드에 도착했다.

 

사실 당시 이 학교의 초기 졸업생들이 훗날 한국 해운을 일으켜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전란 속에서 교사는 폭격으로 전손되고 전황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실습할 기자재도 없었고, 몇 안 되는 교수진과 흩어졌다가 모이곤 하는 학생들-, 이와 같은 상황인데 이들이 뒤에 한국 해운을 건설하는 인재가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학교가 폐교의 위기 속에 부침을 계속하던 때 사회일반은 물론, 정부 인사나 정치인들도 이 해기인력 양성 교육기관에 대해서 회의적이거나, 또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근현대 국가의 성립에 있어서 해운이 얼마나 중요한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전시에 국가 재정이 이처럼 어려운 때에 해기사를 양성하는 4년제 대학을 운영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생각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들의 판단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한 국가가 무역을 하기 위하여 외항해운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선박과 화물, 자본, 해운경영 노하우 등을 갖춰야 하는데, 차후 한국 경제와 해운의 미래를 예측해 볼 때 4년제 해운계대학을 수료한 해기인재들이 활동할 만한 그 어떤 가능성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의 수요에 맞춤하는 1년제 정도의 직업학교로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들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국립해양대학과 한국 해운의 가능성의 그 희미한 줄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황부길, 윤상송, 이재송, 김용주, 유항렬, 홍순덕, 방상표, 정해춘, 김원탁, 지석남, 성철득……, 이들 한국 해운 1세대들은 전란 중의 국립해양대학의 항진을 비상한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6.25전쟁이 한국 해운의 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것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 대한해운공사로 상징되는 한국해운이 그리 많지 않은 선대와 빈약한 선복량이지만 스스로의 해운경영으로 외항해운을 시작했다는 사실과, 반면에 전쟁으로 인해 그 발전의 연속성은 단절되었지만 급증한 원조물자와 민수물자의 수송을 위하여 외국으로부터 최신의 선척이 다수 도입되었고, 전쟁 중에 징발된 모든 선박이 수송활동을 전개하여 승선 근무한 해기인력 활동의 극대화에 따른 전체 해기사들의 해기능력 향상이 이루어졌다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부터 원조 문제 있어서는 물론, 이것은 국가 경제사회 전체에 해당되었던 확실히 절대적인 혜택이었다. 거기에는 전쟁 국민에 대한 유엔의 인도주의와 함께 삼면이 바다를 낀 반도국가라는 지정학적 입장과 주변 관련국의 국방 외교적 판단도 작용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물자들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이다. 이후 한국 사회는 바다와 해운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해기 해운 사회가 외치던 ‘해운입국’이란 이념적 용어가 사회일반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6.25전쟁의 발발은 확실히 한국 해운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으로 끌고 갔다.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국토의 시설과 도로가 심대하게 파괴되어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지만, 오히려 바다에서는 선박들이 더욱 왕성하게 활동했다. 턱없이 부족한 민수물자 수송을 위하여 선박들이 일본을 오가면서 드디어 1950년 10월, ‘한일 간 잠정 해운협정’이 체결 발효되었고, 그 동안 제한적으로 통항하던 일본으로의 항해와 무역이 자유롭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그랬지만 한일간 화물운송은 상당 부분 일본 선박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런 문제는 우리 해운이 ‘자국화자국선’이라는 웨이버제도를 채택한 19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의 와중에 한국 해운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취항을 시도했다는 것은 당시의 형편으로 볼 때 매우 특이한 일이다. 당시 극동해운은 태평양전쟁 때 부산항 앞바다에서 침몰한 배를 인양, 수리하여 고려호라 명명하고 운항요원을 승선시켜 멀리 대양으로 떠나보냈다. 고려호는 42명의 선원이 승무했는데 운항 관리급인 해기사들은 모두 해군 함정 장교들이었다. 이후 한국 해운과 해기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두터운 안개 속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1. 무너진 육지, 견디는 바다

1950년 6월 26일, 전쟁이 발발하고 하루가 지나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동경의 미국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에 이승만은 각료들과 함께 대전행 특별열차로 서울을 빠져 나갔는데, 다시 그 다음 날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가 폭파된 것이다. 6월 28일 새벽에 한강 다리가 폭파되어 차량 다수와 500명 이상이 사망했지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이후 어쩔 수 없이 서울에 갇힌 시민들은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공산치하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6.25전쟁은 전 국토를 피로 물들였다. 통계상으로 남 북의 군, 민간인 모두 합하여 사망 약 77만 명, 부상자 180만 명, 실종 70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사상대립의 심화와 전중부역자 처벌과 같은 후유증과 함께 가족 이산의 슬픔을 남겼고 부모를 잃은 고아들과 신체를 손상한 상이군인 등으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주택과 도로와 산업시설 전반이 파괴되어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땅, 굶주린 거지들이 거리를 떠돌고 불신으로 가득 찬 눈들이 희번덕거리고 도둑강도가 판치고 회생할 희망이 없는 대지가 되고 말았다.

도움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전쟁과 전후에 수많은 원조물자들이 바다를 건너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육지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되었고, 한국 해운에게는 어떤 기회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바다가 있었고, 그 바다에는 해운을 수행할 수 있는 30여 척의 선박과 뛰어난 능력의 해기 전문인들이 있었다. 부산항에 내려진 물자들은 우리의 화물선에 실려 인천, 군산, 목포, 여수, 순천, 마산, 울산, 포항, 삼척, 동해 등지의 연안 해륙접속지로 운송되었다. 전시에 이 선박들의 활발한 운송활동은 당시 부산역에 설치된 대한해운공사의 임시사무소의 활동에서도 잘 나타난다. 당시 연안운송을 맡은 자사 선박의 배선과 선박관리 선원관리를 진행하던 사무소 직원들의 분주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왕성한 해상운송 활동은 그것을 수행하는 해기인들로 하여금 단시간 내에 해기기능을 숙련시키는 작용을 했다. 이것은 해운이 필연적으로 국가 기간산업이게끔 되어 있고 전쟁 전 막 출발한 대한해운공사의 해운 수준이 미성숙 상태이어서 현장의 해기에게 그 활동의 기회가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매우 유의미했다 할 것이다.

전시에 한국 해기 수준의 상승은 증가하는 전쟁물자의 수송을 위하여 미국이 8척의 선박을 대여하기로 결정한 데서 이루어졌다. 도입된 선박은 모두 그 설비와 기기가 최신의 것이어서 그것을 운항할 한국 해기인력을 일본 요코스카에 있는 교육센터로 파견한 것이다. 전쟁 중은 물론이고 전후에도 미국은 한국 지원의 일환으로 선박을 원조 또는 대여 했는데 그 때마다 대두되는 문제가 선박 운항을 누가 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미국은 외국인 해기사(주로 일본인이었다)를 주장했지만 우리는 우리 해기사를 끝까지 고집하고 그 뜻을 관철시켰다. 도입 선박에 대한 운항 주체를 놓고 대립하고 절충하며 해결해 나간 그 대표적인 인물은 대한해운공사의 윤상송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한국에게 도입되는 선박은 그 인수과정부터 한국 해기에게 맡겨야 한다는 그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53년 7월, 휴전이 되면서 징발 선박들과 동원된 해기인력들은 민간으로 돌아갔고 대한해운공사는 해운경영을 재개했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실직자와 유휴인력이 항만의 부두로 몰렸고 하역업과 운송업은 혼란과 무질서가 극심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운업에도 사람들이 몰려 한국의 해운1번지 부산 거리에는 ‘선원 구함’이란 광고지가 부착되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대일 항로에 취항하는 화물선에 승선하길 원했다. 전쟁 중에 정상적으로 문을 연 대일항로, 그것을 오가는 대일선에는 수많은 물품들이 적재되고 양화 되었는데 상당수가 ‘보따리장사’라고 일컫는 비정상적 교역이었다. 당시의 밀수 중에는 마약류와 같은 수입금지품이나 대형 밀수가 발각돼 사회적으로 심각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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