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7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7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1.27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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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에 징발 동원되어 작전 수행 중인 대한해운공사 소속 문산호. 육군특수공작대가 승선한 문산호는 장사동 상륙작전을 감행했는데 높은 파도와 심한 안개로 해안에 착안할 수 없어 로프를 이용해 상륙을 시도하다가 적의 사격과 심한 파도에 떠밀려 좌초했고, 인명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해군에 징발 동원되어 작전 수행 중인 대한해운공사 소속 문산호. 육군특수공작대가 승선한 문산호는 장사동 상륙작전을 감행했는데 높은 파도와 심한 안개로 해안에 착안할 수 없어 로프를 이용해 상륙을 시도하다가 적의 사격과 심한 파도에 떠밀려 좌초했고, 인명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사. 흥남항과 원산항등 국군이 진격했다가 후퇴하는 지역의 해항에서는 대한해운공사 소속 징발선들이 철수하는 국군을 승선시키고 남는 공간에 피난민들을 동승시켰다. 이와 같이 국군 철수 과정에서 징발된 수송선에는 국군을 승선시키고 남는 공간에 민간인을 승선시켜 피난을 도왔다. 그때 어느 선박이 어디서 어디까지 얼마나 수송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는다.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에 나오는 가사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는 이와 같은 당시의 정황을 가장 잘 표현한 유행가이다.

이러한 징발선들은 북한군이 남침하여 급속하게 남한을 장악함에 따라 낙동강 전선 등 남해안의 몇몇 교두보만 남은 상황에서 군 병력과 무기, 식량, 옷감, 차량 등을 수송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 지상군의 총반격이 시작된 이후 해상전투는 주로 유엔군의 기동함대가 담당했고, 한국 해군의 주된 임무는 수송활동으로 전환되었는데 해군의 지휘 아래 이 수송활동의 상당 부분을 징발선들이 맡았다. 당시 전쟁물자 대부분이 유엔군에 의해 일본과 미국 등 외국에서 조달되어 운반되었고, 부산항이 보급기지 역할을 하여 거의 모든 군수물자가 이곳에서 각 전선으로 배분되었다. 6.25전쟁 중에 징발된 대한해운공사 소속의 선박은 모두 20척이었다. 이들 선박 중 14척은 군 수송에 6척은 민간수송에 종사했고, 공사 소속 선박 중 볼틱형 선박 6척은 멸손을 피하기 위하여 일단은 일본으로 옮겨졌다.

6.25전쟁은 남한으로 보아서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었다. 그렇지만 바다의 해상운송인 즉, 해기전문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승선한 선박이 해군에 징발되자마자 작전해역에 투입이 되어 작전명령을 수행하는 데에 전혀 이상이 없었다. 전쟁 당시에 해운계에서는 이처럼 유능한 해기 인력이 백삼사십 명 정도 있었는데, 그들은 상당수가 일본이 벌인 태평양전쟁에 동원되어 수송활동을 하면서 사선을 넘나들었거나, 해방 후 해기사 양성교육기관인 한국해양대학에서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6.25전쟁에서 북한의 해군이 열세였던 점은 한국 해운의 미래를 위하여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대부분의 수송선들이(상당수의 민간선박이 동원되었다) 미해군에 의해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 전시에 수송선의 해기인력은 그만큼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6.25전쟁 중에 해상운송 인력확보의 중요성을 깨달은 국방부는 상선 해기면허 자격자와 일정기간 승무경험자들에 대한 징병을 유예하는 조치를 취했다.

6.25전쟁에서 해군에 징발된 상선은 수송활동뿐만 아니라 상륙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대한해운공사 소속 상선의 상당수가 미국으로부터 대여받은 세계2차대전 시 전쟁표준선으로서 상륙작전에 투입된 LST형이었다. 상륙작전은 그 특성 상 어렵고 위험이 따르는 작전으로서 운항을 맡은 해기 인력도 희생을 각오해야 했으므로 실제로 전쟁 당시에 연합군의 상륙작전에서 해기인력도 위기를 겪어야 했다.

미 극동군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면서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교란작전을 전개하였는데 장사상륙작전과 석도상륙작전이 바로 그것이다. 장사동은 포항 북쪽에 위치한 작은 어촌이며 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군특수공작대 772명을 승선시키고 1950년 9월 13일 오후에 현지 해역에 도착한 징발선인 문산호는 높은 파도와 안개가 심하게 껴 해안에 착안着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육지에서 약 30m 떨어진 곳에서 로프를 이용해 상륙작전을 감행했는데, 적의 맹렬한 사격과 함께 문산호는 심한 파도에 떠밀려 좌초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문산호는 해군본부에 구조요청을 하였고, 미군의 해난구조선과 대한해운공사 소속 조치원호가 현장에 도착하여 구조작업을 벌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조치원호는 미군함대의 엄호사격과 함께 적의 맹렬한 사격을 받으면서 인명만을 구조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났다. 이 문산호에는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실습 차 승선해 있었다.

석도상륙작전에 투입된 징발선은 홍천호였는데, 석도를 향하여 항진 중 적으로부터 맹렬한 해안포 공격을 받았다. 그 중 한 발이 홍천호에 명중하여 선측에 큰 파공이 나 선체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선교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아래의 기관실로 내려가 숨어 버렸는데, 이대로 두면 배는 석도를 향하여 그대로 돌진할 상황이었다. 그 때 1등항해사 박현규는 조타수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키를 잡게 하고 배를 후방으로 돌려 피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홍천호는 적탄을 한 방 더 맞았다. 결국 홍천호는 심하게 파손되어 정상 운항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 이대로라면 홍천호는 계속 포격을 당해 침몰할 것이 명백해졌다. 천신만고 끝에 홍천호는 연평도로 내려와서 해안에 좌초시켰고, 연평도에서 우선 급한 곳을 수리하여 겨우 운항할 수 있는 상태에서 부산으로 항해하여 대한조선공사에 입거, 수리작업을 하였다.

6.25전쟁에서 대한해운공사의 선박들은 기뢰 제거 작업에도 투입되었다. 통영수산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이 회사에서 선장으로 승선근무한 김윤석(1962년에서 2002년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운기업 중 하나인 천경해운을 경영했음)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전쟁 중에 징발된 선박에 승선하면서 장전, 고정, 원산 부근의 해역에서 기뢰를 제거하는 작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한해운공사의 징발선 영등포호는 원산에서 기뢰에 접촉되어 침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징발선의 ‘해기’는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육지는 육지 나름대로 군병력과 군수물자 그리고 민간인들과 민간 수요 물자의 해상수송을 지휘 관리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바다에서는 항해와 적재 양하 작업으로 바빴다. 육해상에서 대한해운공사 ‘해운’ 시스템은 전시에 맞춰 바쁘게 돌아갔고 그에 따라 바다의 해기는 그 능력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점점 향상되어 갔다. 대한해운공사가 기존에 보유한 선박들은 여전히 운항상태가 잘 유지되었으며 유엔군으로부터 새로 도입된 선박에서는 새로운 항해기기와 엔진 사용법을 익힐 기회가 있었고, 이제 갓 졸업한 국립해양대학(이 학교의 전신은 진해고등상선학교이다) 해기사들은 3등항해사?기관사에서 2등항해사?기관사로, 1등항해사?기관사로 승진했다. 전시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일본으로 철수한 선박 6척이 되돌아와서 민수 분야의 운송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후 추가로 대여 받은 전표선 6척과 함께 한국 수송 선대는 운송능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이대로라면 종전 후 한국 해운은 더욱 보강된 선복량으로 힘차게 날개를 펴 나갈 것 같기도 했다.

전쟁 중 한국 해운의 걱정은 해기인력 양성 교육기관인 국립해양대학의 불안한 진로에 있었다. 전쟁 내내 학장 이시형과 몇 안 되는 교직원과 학교를 신뢰한 재학생들의 고통과 희생이 있었다. 진해의 교정을 해군병학교(지금의 해군사관학교)에 내어주고 인천으로 쫓겨 가 부초처럼 떠돌다가 어렵게 마련한 군산 교사가 전쟁 중에 폭격으로 소실되고 만 국립해양대학은 이후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학장 이시형과 교직원들은 부산의 대한조선공사 도크 안벽에 계류 중인 목조 소해정 YMS에서, 해운대국민학교를 빌려서, 다시 군산으로 돌아가 폭격으로 거의 잔해만 남은 교정에서, 또 다시 부산으로 와 거제리의 교통고등학교에서 천막을 짓고 학사를 진행해 나갔다.

본래 해기사 양성 교육기관은 그 특성 상 거의 전액 관비로 운영되어야 하지만, 졸지에 전 국민이 겪는 환난이어서 재정의 어려움과 학사를 진행할 교사건물과 선박사관 근무 생활 교육이 진행될 생활관이 미비 되어 학장 이시형과 소수의 교직원들은 이합집산하는 학생들과 함께 하루하루 어렵게 학사를 이어갔고, 그렇게 국립해양대학은 앞날이 불투명하여 언제라도 학교 문을 닫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 교직원과 학생들은 현재의 고난과 고통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려울 적마다 선생은 학생을 격려하고 학생은 선생을 따르며 역사가 주는 시련의 질곡, 굽이굽이를 넘어가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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