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서진문 서거 90주기 참례기
독립투사 서진문 서거 90주기 참례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1.26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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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서진문 서거 90주기 추모제에 참례했다. 지난 17일에 동구 화정공원에서 열린 이 행사는 시민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진행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재일 조선인노동자의 권익보호와 항일 운동을 펼치다가 순국한 서진문의 삶을 기리는 행사였다. 참례자는 50여명으로 단출했지만 갖추어야 할 것은 다 갖춘 경건한 의식이었다. 서 의사의 외손자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후손들 일부와 동구청장과 전·현직 시의원과 구의원 일부도 함께 했다. 의사의 공적이 낭독되고, 추모사와 유족 인사, 추모노래와 진혼무, 헌작과 헌화 등이 진행되었다.

추모제에 가기 전부터 궁금한 게 많았다. 어떤 곳에, 어떤 모습으로 누워 계실지가 궁금했고, 묘비 내용 중 가족관계를 밝혀줄 단서도 찾고 싶었다. 현장을 보니 묘소가 있는 곳은 경사가 심한 소공원이었다. 묘역은 다소 협소하고 동북간으로 자리하고 있었지만 자리는 편안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 2년 전인 2004년에 묘역을 정비하고, 상석을 놓고 비를 세워두었는데, 처음 묘가 조성될 때 성세빈의 글씨가 새겨진 표석은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95세의 고명딸 대신 외손자를 만나 무척 반가웠고, 많은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서진문은 참으로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1901년에 울산 동면 일산마을에서 태어나 병영에 있는 일신학교에 입학했다가 남목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다시 배움의 길을 찾아 도일했다가 1923년 9월 1일의 관동(關東)대지진을 만났다. 관동대지진은 5분 간격으로 진도 7.2에서 7.9 사이로 세 차례 일어났고, 이어지는 여진으로 10만 이상의 희생자가 나자 일본은 완전 패닉 상태에 이른다. 이에 일본 자경단이 악성 루머를 조장하여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는데, 이때 서진문도 크게 다쳐서 천신만고 끝에 귀향했다.

그런 그가 왜 지옥을 경험한 요코하마로 다시 갔을까. 당시 방어진은 일본 수산업자들의 거점이 되면서 조선 어민들을 수탈하는 현장이었다. 우리 땅에 일인들이 방어진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지켜본 서진문은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특히 그는 요코하마에서 조선인 대학살 현장을 경험했고, 조선인 노동자들의 착취를 눈으로 보았으니 오죽했으랴.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처자식의 만류를 뿌리치고 3년여 만에 다시 현해탄을 건넜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깨어 있는 한 선각자의 외롭고 의로운 모습이 읽혀진다.

서진문이 다시 도일한 후의 이야기는 기록으로 전한다. 최초의 보도는 1927년 8월 11일자인데, 그가 ‘재일본조선노동연맹 가나가와(神奈川)현 조선노동조합’ 임시총회에서 상임집행위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의사의 노동운동은 곧 항일운동의 일환이었고, 동포애의 발로였다. 의사의 죽음을 알린 것은 순국 열흘 뒤인 1928년 11월 27일자의 조선일보다. 석방되자마자 급사하였으며, 유언과 영결식 장면들이 신문에 실렸고, 그 뒤 동아일보에서는 미망인 윤상필이 친정어머니와 어린 딸 하나를 봉솔하고 슬픔에 잠긴 이야기를 실었다.

서진문에 대한 관심은 사위인 천재동에게서 시작되었다. 증곡 천재동은 토우, 탈, 연극, 민속놀이, 동요민속화에 일가를 이룬 멀티예술가이다. 특히 동래야류 말뚝이탈로 대표되는 탈 제작 부문에서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았음에도 상설 전시공간이 없다. 이런 천재동과 63년 동안 해로했던 부인이 바로 서진문의 딸이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독립운동가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기피하는 풍토였을 텐데 어떻게 결혼이 가능했는지를 물은 질문에 외손자의 대답은 이랬다. “아버지는 서진문의 딸이라면 볼 것도 없이 무조건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답니다.”

결혼하던 해인 1944년의 천재동은 시대의 첨단을 걷던 모던보이(Modern Boy)였다. 그는 예술뿐만 아니라 각종 운동경기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인 걸출한 인재였다. 숱한 여성들을 물리치고 독립운동가의 딸을 배우자로 선택한 천재동은 당신이 뿌린 한 점 혈육에게 천상의 아버지가가 내려 보낸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무남독녀와 결혼한 천재동이 장모의 부양책임도 각오했음은 물론이다. 서진문의 아내와 딸 서정자 내외가 같은 집에서 구순 성상의 수를 누린 것도 서 의사로부터 받은 기운이 작용했지 않나 싶다.

서진문의 순국을 두고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일왕 즉위식을 앞두고 예비검속을 당했다는 설과 즉위식 장소로 이동하는 전차에 올라 일왕을 저격하려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사실 규명을 위한 노력이 따라야 하겠지만 피체되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국가가 독립유공 서훈을 내린 이런 애국지사에 대한 예의가 그 동안 너무 소홀했음을 구청장도 인정했다. 차제에 동구청은 추모제뿐만 아니라 ‘서진문 의사’ 묘소의 현충시설 지정과 추모사업회 발족 등에 적극 나서기를 촉구한다.

이정호 수필가·울산학포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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