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와 인류 그리고 행복
쓰레기와 인류 그리고 행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1.22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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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량 발생하거나 학술적 용어로 쓰일 때의 ‘쓰레기’를 우리는 ‘폐기물’이라고도 표현한다. 필자는 폐기물처리공학을 전공했지만 폐기물과 인류의 긴 역사를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다. 그 보다 우리가 직면한 쓰레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에 집중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쓰레기 처리 문제가 세계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쓰레기를 다시 바라볼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도 진행 중인 쓰레기 문제는 세계 공통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쓰레기 처리를 못해 비위생적 환경에서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쓰레기 비즈니스로 돈을 버는 사람도 있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쓰레기 문제의 원인은 무엇일까? 쓰레기는 언제 생겨났을까? 인류와 쓰레기가 함께한 역사는 얼마나 될까? 쓰레기와 함께한 우리 인류는 과연 행복했을까? 행복하지 않다면 그 원인은? 그 해결책은 없는 걸까?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쓰레기와 인류 그리고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호모사피엔스인 현 인류의 조상이 지구별에 출현한 것은 불과 35만 년 전이다. 45억 살의 지구 나이를 생각하면 인류의 탄생은 찰나에 가깝다는 느낌마저 든다. 어쨌든 지구별에 모습을 드러낸 우리의 조상들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수렵채집 활동을 했다. 비와 바람을 피하기 위해 동굴생활을 했던 그들은 각종 열매와 과일, 운 좋게 사냥한 고기를 먹을 수 있었고, 남은 음식찌꺼기를 동굴이나 주변에 버렸을 것이다. 지구상에 최초의 쓰레기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원시인들에게 쓰레기는 행복의 걸림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식량을 찾아 항상 이동해야 했기에 쓰레기로 동굴이 좁아지면 다른 동굴로 이동하면 되고, 시간이 흘러 다시 그 지역에 왔다 해도 대부분이 유기물인 쓰레기는 이미 분해되어 각종 과일과 열매에 필요한 거름이 됐을 것이다. 자연에서 취한 것을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순환구조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농경사회의 시작과 함께 상황은 달라졌다. 밀, 보리, 벼가 주된 에너지원으로 자리하면서 인류는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양의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자연을 파괴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때론 가뭄과 태풍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기도 했지만 전보다 더 많은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착생활은 여성들의 출산과 육아에 좋은 환경을 제공했고 인구의 급증도 가져왔다. 더 많은 인구는 더 많은 식량과 더 많은 소비를 야기했고, 그 결과 수렵채집 시대와는 비교가 안 되는 양의 쓰레기가 거리로 쏟아졌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굽 높은 구두 초핀에서 유래한 ‘하이힐’은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상상해 보자. 비포장도로에 창밖으로 던져진 생활쓰레기가 범벅이 되어 악취가 진동하는 진흙탕 속을 귀족여성들이 얼마나 걷기 싫어했을지? 쓰레기는 패총(貝塚)처럼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관찰할 수 있는 귀중한 고고학 무대가 더 이상 아니었고, 위험한 병원균의 온상을 만들어 갔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 전염병으로 알려진 흑사병(페스트)이 창궐했고, 14세기 중반, 유럽 전력을 휩쓴 흑사병으로 최소 7천500만 명에서 최대 2억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갔다. 흑사병의 공포는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쓰레기가 행복을 갈망하던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을 안겨준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처럼 인류의 탄생과 함께해 온 쓰레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산업혁명을 가속화하면서 인류는 전대미문의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었고 이는 대량소비로 이어졌다. 우리 인류가 전례 없는 쓰레기 생산 체계를 갖춘 것이다. 게다가 유기물이 대부분이던 농경사회와 달리 산업혁명 이후의 쓰레기는 학자들도 알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다. 흑사병 공포와 뼈아픈 교훈 덕분에 인류는 매립지라는 쉽고 빠른 처리방식을 선택했다. 하지만 썩지 않는 쓰레기와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모든 것을 땅에 묻을 수만은 없었다. 결국 소각으로 부피를 줄이고 재활용으로 매립을 최소화하며 쓰레기 처리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왔다. 그러나 이것도 돈과 기술을 갖춘 선진국 이야기다. 아직도 개발도상국은 버린 쓰레기를 산처럼 쌓아놓고 침출수와 지하수 오염으로 설사와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통한 경제성장이 자본주의의 미덕으로 여겨지면서 대량소비는 자연스레 행복의 조건으로 자리했다. 실제로 선진국의 1인당 쓰레기 발생량은 후진국보다도 많다. 쓰레기가 윤택한 삶과 행복을 상징하는 오브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류는 과연 행복해진 것일까? 소비로 얻은 행복은 영원한가? 그렇다고 수십만 년 전의 수렵채집 생활로 돌아갈 순 없다. 하지만 우리 인류가 행복을 위해 탄생시킨 ‘소비의 미덕’이란 신화가 우리 아이들의 삶을 위협하게 해선 안 되지 않을까? 물론 과학기술의 발전은 재활용 기술을 한층 고도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재활용이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다. 그보다 쓰레기의 발생을 줄이는 것이 우선이다. 적게 버리고 철저히 분리배출을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이자 행복의 지름길이 아닐까?

김희종 울산발전연구원 환경안전팀장/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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