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6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6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1.20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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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웅진호의 1등항해사로 승선근무하던 박현규와 그의 동료들. 사진에 새겨진 단기 4283년은 1950년에 해당되므로 전쟁 발발 약 3개월 전에 촬영한 사진으로 여겨진다. 박현규는 훗날 한국 해운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6.25전쟁 당시 웅진호의 1등항해사로 승선근무하던 박현규와 그의 동료들. 사진에 새겨진 단기 4283년은 1950년에 해당되므로 전쟁 발발 약 3개월 전에 촬영한 사진으로 여겨진다. 박현규는 훗날 한국 해운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학생들에게 그들과의 만남은 참으로 감동 그 자체였다. 김홍일 장군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독립지사들이 와서 연설을 하며 축하했고, 아직 환국하지 못한 교포들과 고국을 떠난 학생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이 날의 만남은 실습생들에게 조국이 무엇인가를 뜨겁게 느끼게 했다.

미국이 원조한 전표선 가운데 FS형은 570총톤급인데 그 일부는 화객선으로 개조되어 연안 해안지방과 도서를 잇는 여객선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이 여객선이 취항하는 항로를 무지개항로라고 불렀는데 묵호에서 부산은 갈색, 부산에서 군산은 등색, 부산에서 충무는 황색, 부산에서 울릉도는 청색, 부산에서 제주는 녹색, 군산에서 옹진은 자색의 여객선이었다. 무지개항로가 개설되면서 해안 도서지방의 교통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10. 6·25전쟁과 해운

대한해운공사 소속 웅진호에 승선 근무 중이던 1등항해사 박현규는 6.25 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일 26일 새벽 해군본부로부터 작전명령을 받았다. 당시 박현규의 웅진호와 같은 회사 소속 문산호는 동해안의 묵호항에 정박해 있었는데 해군의 지시에 의하여 묵호경비부의 전 장병과 군수물자를 적재하고 포항으로 철수하는 작전에 동원되었다.

묵호항을 출발한 배는 포항 앞 바다에 이르렀다가 다시 북상하여 삼척, 북평 근처 해역에서 해상경비 활동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밤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선박을 발견했다. 그들은 즉각 그 선박을 향하여 소총을 발사했는데 그 선박에서도 즉각 포격을 가해 와 문산호는 피항하여 삼척 연안의 모래밭에 배를 얹히게 하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자 드러난 이 거대한 괴선박은 함상에 미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미 함정의 도움을 받아 사태를 수습한 문산호는 우리 측 함정들과 함께 연안을 따라 후퇴하는 육군과 경찰 병력을 곳곳에서 승선시켜 포항에서 이들을 하선시키고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6.25전쟁은 대한해운공사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일본으로부터 힘들게 반환받아 수리를 하여 운항하고 있던 선박들과 교통부가 운영하던 관영선박, 모두 합쳐 33척으로 민과 관이 ‘해운입국’의 일념으로 일치단결하여 여러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일궈낸 새로운 해운경영조직인 ‘대한해운공사’를 발족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전쟁이 발발하여 우리들의 해운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전쟁 발발 확인 즉시 해군본부는 수송을 위하여 대한해운공사의 선박 중 미국으로부터 대여 받은 선박 20척을 동원 징발했다.

서해 쪽에서는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단양호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단양호는 해군에 동원되어 인천항에서 물자를 적재하고 수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배에는 한국해양대학 실습생들이 승선해 있었고 선장은 태평양 전쟁 중 대양에서 여러 번 사선을 넘은 적이 있던 이재송이었다.

공산군이 서울을 넘어 인천 시내를 장악하고 이쪽 인천항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첩보가 전해지자 갑문(인천항은 지금도 그렇지만, 조수차가 너무 커 갑문을 개폐하여 배가 출입했다)을 담당한 항만직원이 손을 놓고 도망을 가고 말았다. 조수가 만조가 되어 배를 움직여 떠나야 하지만 갑문이 닫혀 있어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태, 다시 공산군이 부두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다급해진 이재송은 그렇지만 침착하게 실습생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특공대로 나선 몇 명의 학생들이 공산군들의 시선을 피해 갑문개폐실로 잠입하여 개폐기를 힘들게 수동으로 작동했다. 드디어 갑문이 열리고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공대가 무사히 돌아왔음을 확인한 이재송은 크게 출항 신호를 울리게 했다. 잠시 후에 엔진이 걸리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태를 눈치 챈 공산군들이 일제히 사격을 하기 시작했지만 단양호는 아무런 이상 없이 출항하여 항진해 갔다. 만약에 당시에 탈출에 실패하여 배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선체와 거기에 적재된 물자와 그리고 중요한 해기인력인 실습해기사들을 잃게 되어 한국 해운은 손해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인천항을 떠난 단양호는 해군작전 수행을 마치고 학교가 있는 군산항으로 돌아갔다.

군산에서는 한국해양대학의 학장 이시형이 학교의 향방을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진해의 교사를 미군정에 내주고 교사를 마련하지 못한 채 폐교 위기 상태에서 거의 기적적으로 마련한 군산 교사였는데,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여 이미 전국의 대부분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고 많은 사람들이 부산 지역으로 피난을 갔거나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시형은 재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모두 떠난 지 20여일 만에 군산을 떠났다. 그 후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군산으로 돌아왔지만 교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폭격을 당한 것이다.

전쟁 중에 수많은 원조물자, 군수물자들이 해외로부터 들어왔다. 물론 이러한 물자들의 수송은 한국 선박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한국 선박 즉, 대한해운공사의 선박들은 해군작전에 참여하여 주로 연안수송을 맡았다. 전시에 한국 해운이 담당했던 수송 분야가 비록 연안 수송에 한정되었지만 이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내륙의 도로들이 상당수 파괴되어 기능을 상실했던 상황을 생각한다면 우리 해운이 수행한 해상운송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겠는가. 삼면이 바다이고 해안인 반도국가에게 해운은 그야말로 생명줄임을 증명한 셈이다.

연안에서 연안으로 수많은 물자와 인력들이 수송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국제시장’이란 영화에 보면 흥남항 부두에서 민간인들이 탈출하기 위하여 배에 오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전시에 해상운송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전쟁 발발 초기에 우리 해군 수송 선단은(동원된 민간 상선 포함) 서울을 탈출하여 목포에 도착한 대통령과 각료 일행을 임시수도인 부산에 이동시켰고 서울이 수복된 이후에는 정부의 요인과 정부 각 기관들을 피난지 부산에서 인천으로 수송했고, 그외에도 군병력과 군수물자, 민간인들의 이동이 해상수송으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6.25전쟁 중에 서해안, 남해안, 동해안에서는 인력과 물자 수송을 위하여 해상운송이 진행되었는데 대한해운공사가 보유한 대다수의 선박이 동원되어 작전에 참여했고, 그 현장의 수행자는 물론 해기인력들이었다. 특히 민간인들과 민수물자 수송을 위하여 해운국은 부산역 구내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 분주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6.25전쟁 시 물자와 인력의 해상수송을 담당한 상선들의 활약은 참으로 대단했다. 화물운송을 위하여 바다에서 항해 중인 대한해운공사의 선박들은 회사로부터 전쟁발발과 향후 선박 운항은 해군본부의 작전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무선전신 연락을 받고 작전해역에 투입되었다.

6.25전쟁에서 해군에 징발된 대한해운공사 선박들의 수송 활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 해양대학생 120명이 실습 승선 중이던 단양호(선장 이재송)는 인천항에서 양하를 마치고 귀항 도중 군산 앞바다에서, 전쟁이 발발하여 선박과 인력이 군에 징발되어 향후 해군본부의 지시에 따른다는 무전연락을 받았다. 단양호는 해군 작전명령에 따라 급선회하여 웅진반도의 철수병들을 인천항까지 수송하였다. 그러고 나서 단양호는 부평에 있던 육군창고의 군수물자를 군산항까지 수송하였는데, 인천항에서 출항 시 공산군이 부두로 진입했지만 갑문 개폐 직원이 도주하고 없어 학생들이 직접 손으로 작동하여 탈출하는 위기를 겪었다.

나. 7월 20일, 광주를 점령한 공산군이 목포로 향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징발선 김천호와 울산호를 이용하여 정부미 8만 가마를 부산으로 수송하였다.

다. 7월 23일, 목포경비부는 징발선 단양호에 병력을 승선시켜 해상으로 철수시키고 정세를 관망했다.

라. 7월 24일, 적이 순천까지 진입해 오자 해군은 조치원호와 안동호 등 8척의 징발선을 여수로 파견하여 아군의 해상철수를 수행하고 정부물자와 군수물자를 선적했다.

마. 전쟁 중에 제주도에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되었고 그밖의 많은 부대도 제주도에 집결되어, 징발선들은 훈련병을 비롯한 각종 보급물품을 제주도로 수송하였다.

바. 서해안에서 피난민 대열이 계속 이어졌다. 서해안에서는 주로 진남포와 인천항에서 피난민을 승선시켜 부산이나 거제도까지 수송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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