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5)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5)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1.13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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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당시 남대문 앞에 위치했던 조선우선 건물.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의 해운 장악, 태평양전쟁에서는 지정항로를 설정, 전쟁물자를 실어 날랐던 조선우선은 해방이 되자 미군정청에 의해 김용주에게 인수 운영되었다.
광복 당시 남대문 앞에 위치했던 조선우선 건물.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의 해운 장악, 태평양전쟁에서는 지정항로를 설정, 전쟁물자를 실어 날랐던 조선우선은 해방이 되자 미군정청에 의해 김용주에게 인수 운영되었다.

 

해방 후 선복량 증가를 위하여 한국 해운이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일본으로부터 선박 반환이었다. 무역을 위하여 외양으로 배를 띄우는 일은 많은 자본이 드는 일이어서 해양국으로 성장한 대개의 국가들이 그 과정에는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있었다. 그러니 식민 상태에서 갓 벗어난 한국 해운이 선복량 증가를 위하여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으로부터 선박반환은 ‘미군정청 법령 제33호’가 공포되고 나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은 험난했다. 반환선박의 기준은 일제강점하에 조선적이었거나 1945년 8월 9일 기준으로 한반도, 또는 조선 수역에 있던 일본 선박이었는데 일본은 패망하고 철수할 때 전쟁에서 침몰되지 않고 남아 있던 조선우선 선박들을 끌고 가 버렸으며 나머지 선박들도 어딘가로 숨겨 두고 있었다. 그들은 철수할 때 관련 서류들을 모두 폐기했기 때문에 반환 선박의 목록을 만드는 일도 난망했다. 이 때 부산항의 급수업자 박봉삼이 부산항에 입항한 선박에 급수한 일지를 참고하여 문제의 반환선박 리스트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이것은 반환선박을 안건으로 진행된 한일간의 해운회담에서 오리발을 내미는 일인 대표들에게 꼼짝할 수 없는 증거가 되었다.

 일본으로부터 선박 반환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받은 조선우선의 임직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것은 신생조국의 해운의 시작을 염원하는 모든 해기사들의 환성이기도 했다. 1946년 10월 조선우선은 반환선박 천광호를 인수하기 위하여 진성문 선장과 지석남 기관장 등 20여명으로 구성된 인수팀을 일본 하카다 항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인수단이 현지에 도착하여 선박의 상태를 점검해 보았는데, 실망스럽게도 보일러기관이(당시 반환선박은 대부분 증기 왕복동기관이었다) 전혀 쓸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부두에 매어 놓고 배가 너무 오래 되고 낡아서 항해선으로 쓰기보다는 다른 용도로, 즉 보일러에 해수를 넣어 가열하여 소금을 만드는 데 썼던 것이다. 인수팀은 모두 앞이 캄캄했다. 저렇게 염분과 녹이 낀 상태에서는 기관 작동은 불가능한 것이다. 할 수 있는 방법은 2가지, 여기 조선소에서 엔진 수리 또는 교체를 하거나, 아니면 일단 예인해 가져가는 방법이 있는데 둘 다 그럴 여건이 아니어서 선박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인수팀은 많은 고민을 했다. 인수팀을 구성하고 여기까지 오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다. 이대로 빈털터리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한 번 해 보자. 어떻게라도 한 번 해 보자. 신생조국의 해운이 우리들의 양 어깨에 메어 있다. 이렇게 인수팀은 모두 한 마음으로 일치단결하여 곧바로 녹 제거 작업에 들어갔다. 약 20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기관의 염분과 녹을 제거했다. 그리고 드디어 성공했다. 기관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후 선내에 ‘출항 준비, 모든 부서 출항 배치 붙어’ 라는 선내방송이 쩌렁쩌렁 울렸다. 선수 선미에 계선줄이 풀리고-, 그런데 닻을 감으니 닻이 올라오지 않는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 되어 있었던 나머지 닻이 해저에 깊이 파묻힌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닻 양묘揚錨 작업에 며칠을 소비하고, 마침내 하카다 항을 출항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강력한 맞바람을 받아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바람이 강한 탓도 있지만 엔진의 성능이 약한 때문이다.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매우 저속이었지만 무사히 부산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 해운 외양항해 초기에 이와 같은 어려움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은 전표선을 인수한 어느 기관장은 배가 일본 규슈 어느 어촌 항구로 들어가다가 그만 좌초를 하고 말았는데, 만조 시에 기관을 전속 후진하여 부양에 성공하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좌초와 이초離礁 과정 중에 주기관이 많이 손상되어 이대로 귀항하면 자신은 물론 함께 승선한 선원들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되었다(당시 선박 인수를 위하여 선장 기관장 같은 상위직 해기사에 외국인을 고용하려 했지만 한국 해기사들은 이를 반대하고 자신들이 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하여 그것이 받아들여졌다). 항해 중 다행히 기관 수리에 성공한 배는 무사히 모항으로 귀항할 수 있었다. 일찍이 해방 되자마자 홍순덕 선장이 일본인 선장과 선원들을 강제 하선시키고 인수에 성공한 부산호는 조선소에서 수리를 마치고 운항을 계속하다가 다도해 해역에서 좌초했는데 암초에 얹힌 배를 천신만고 끝에 빼내어 예인했지만 안타깝게도 침몰하고 말았다. 당시 하나밖에 없는 해운기업인 조선우선에게는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어떤 배에서는 항해 중 기관 수리를 위하여 기관사가 직접 그 뜨거운 보일러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는 물에 적신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보일러에 들어가 수리작업을 감행했다. 그 결과 훗날 그는 후유증으로 치아를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한국 해운 외양항해 초기에는 이처럼 좌초, 난파, 기관고장이 잦았고 심지어는 침몰도 감수해야 했다. 당시 그들에게 주어진 배들은 너무나 낡고 오래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오직 한국 해운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신념 하나로 견뎌 내었다.

 미군정이 실시되면서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미 전표선의 원조 또는 대여는 한국 해운이 일어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그들은 일본 점령 하에 있었던 한반도의 복구와 정부 수립을 위하여 원조물자와 군수물자를 수송해야 했는데, 해상운송을 담당할 선박을 운항할 승무직에 한국인 해기사들이 담당하겠다고 강력하게 제의해 왔다. 그것은 해기 전문인에 의하여 한국 해운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시종일관된 의지이기도 했다. 그러자 미국은 미 전표선의 인수를 위하여 대기하고 있던 일본 해기사들을 철회하고 한국인 해기인력에게 인수를 맡겼다.

 당시의 이와 같은 해기전문인들의 해운 주체의식과는 달리 해양에 관한 한, 한국 사회일반은 매우 무지했다. 사람들은 외양해운을 수행하는 소위 대형 화물선(그때에는 2,3천톤만 되어도 대형선이었다)의 운항과 선원의 삶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국해양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여서 배를 추진하는 스크루가 선수에 붙었는지 선미에 붙었는지 모르는 학생들도 부지기수였다. 문제는 역시 실무를 담당해야 하는 해기사들이었다. 진해고등해원양성소 출신자들과 일본 해기 유학파들이 한국 해운을 선도해 나갔다고는 하지만, 그 외에도 해원양성소의 별과 출신자들과 일반 평선원에서 승급한 해기사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들에게 새로 도입되는 미국 대여선들은 낯설고도 두려운 대상이었다. 고작해야 200 내지 300총톤급의 선박을 운항한 경험밖에 없는 그들에게 2천톤급 이상의 미 전표선은 큰 섬과 같이 보였고, 작동방법도 잘 모르는 계기들이 수두룩했다. 어쨌든 그들은 열심히 연구하고 협조하며, 또 도전하는 자세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갔다.

 1948년 2월, 드디어 광복 후 최초로 태극기를 게양한 우리 화물선 앵도호가 화물을 싣고 외양으로 출항했다. 한국 해운의 역사가 새로 시작되는 날이었다. 앵도호는 홍콩에 취항하여 성공적으로 화물을 처분하고 무역 상담도 마치고 돌아왔다. 이 앵도호는 그 해 12월에 대북 교역 차 원산항에 입항했다가 억류되어 나중에 선원만 돌아오는 불운을 당했다. 이와 유사한 예는 그 전에 조선우선에서 미군정청으로부터 대여받아 운항하던 화물선 ‘킴볼 알 스미스’호에도 있었다. 이 배는 친북 좌익세력이 몇 명 승선해 있었는데 그들이 선장 이하 선원들을 무력으로 협박하여 배를 끌고 북으로 넘어갔다. 이후 배는 돌아오지 않았고 선원들은 6.25전쟁 중에 한국해양대학 실습생이던 김주년과 박순석만이 살아 돌아왔다. 한국 최초의 실습 외양항해는 1947년 10월, 조선우선 소속 미 전표선 LST(상륙정, 상륙작전에서 선수의 문이 열리면서 해병대 병력이 뛰쳐나가는 바로 그 배이다)형인 ‘KBS 2호’에 의해 이루어졌다. 실습생과 화물을 적재한 배는 서해의 넘실거리는 파도를 넘어 상하이항에 도착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도시 중의 하나이고, 당시는 아직 중국이 공산화되기 전이어서 활기가 넘치는 상하이에는 아직 환국하지 못한 교포들과 독립운동 애국지사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은 바다를 건너온 실습생들과 교직원들을 성대하게 맞이해 주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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