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4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4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1.06 23:02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차세계대전시 미국 전쟁표준선. 미국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약 5천 척의 전쟁표준선을 건조했는데 신생 대한민국의 원조물자 수송과 해운발전을 위해 약 30여 척을 무상제공 또는 임대하고 그 운항을 한국 선원들에게 맡겼다. 이는 해운입국의 사명에 불타는 한국 해기사들의 강력한 의지가 있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2차세계대전시 미국 전쟁표준선. 미국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약 5천 척의 전쟁표준선을 건조했는데 신생 대한민국의 원조물자 수송과 해운발전을 위해 약 30여 척을 무상제공 또는 임대하고 그 운항을 한국 선원들에게 맡겼다. 이는 해운입국의 사명에 불타는 한국 해기사들의 강력한 의지가 있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해운행정가로서 다시 출발한 해기사 황부길은 해운국의 업무 파트너로서 해정과장에 이종우, 업무과장에 문덕주, 표지과장에 방종철, 조선과장에 전덕준을 임명했다. 그들은 모두 해기 해운의 실무 경험을 소유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훗날 한국 해운과 해군을 아우르는 한국 해양계의 소중한 인재들이 되었다.



한국 해운이 자리를 잡기 전에 이미 대외항로에 취항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조선우선의 앵도호(당시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은 5척 선박 중의 하나이다)는 화신무역상사에 용선되어 건어물 수출화물을 싣고 홍콩으로 출항했다. 앵도호는 홍콩에 약 30일간 정박하면서 상품을 처분하고 현지의 무역상과 교역을 체결하는 등 성공적인 항해를 마치고 귀항했다(앵도호는 그해 11월에 남북교역 차 북한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했고, 이로 인해 조선우선의 경제적 피해는 컸다).



1948년 정부수립 후에도 그러했지만 광복 후에 한국은 해운을 할 만한 해운자본도 없었고 경영노하우도 부재했다. 미 전쟁잉여 선박(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우방의 복구를 위하여 전시 쓰다 남은 물자를 무상제공했다) 31척을 제공받았지만 어쩔 수 없이 교통부 해운국에서 관리 운영했다. 이를 당시에는 부영선박이라 불렀다. 회고하면 이와 같은 관영해운은 구한말 ‘통리기무아문’이라든지 ‘전운국’에서 시행된 바가 있는데 다소 차이는 있지만 부실운영이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부영선박의 경우만 보면 그 적자가 매우 커서 교통부 장관이 국회에 호출되어 해명을 해야 할 입장까지 될 정도로 문제가 되었다.

사태가 이러하자 교통부 장관 허정은 조선우선의 사주 김용주를 만나 조선우선이 부영선박을 인수하고 위탁운영을 해줄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조선우선의 이익뿐만 아니라 한국 해운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김용주는 많은 고민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까지만 해도 사실 조선우선은 흑자 경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용주는 실익과 명분의 경계에 서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회사 임직원들의 자문을 구했다. 그 결과 반관반민의 선박회사를 새로 설립하자는 결론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책기업인 ‘대한해운공사’의 설립 배경이다.



대한해운공사의 설립은 당시 해운국장 황부길의 현명한 판단과 조선우선 임직원들의 해운경영에 대한 안목과 사주인 김용주의 사심 없는 용단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김용주는 자사의 보유 선박들을 새로 설립될 공사에 인계했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대한해운공사의 초대 사장직에 올랐다. 그는 2년 동안 대표직을 수행했는데, 이승만 정권 시 경무대의 입김이 작용하여 지나치게 고가로 도입하게 된 마산호의 선박도입에 반대하다가 사장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대한해운공사가 설립되기까지는 그 외에도 여러 차례 입법적 행정적 과정이 있었다. 1949년 9월에 대한해운공사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대한해운공사 설립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위원회의 위원들은 해운국장 황부길을 제외하면 모두 당대의 유력한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공사는 교통부장관의 인가를 받고 민간공모주를 모집했는데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 주식 청약 경쟁률이 1.6대 1이 되었다. 1950년 1월 1일,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이자 마지막 국책 해운기업 ‘대한해운공사’가 발족되었다. 해양한국으로 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구한말 조선인 최초의 선장 신순성 이래 일제 치하에서 굴욕을 견디고 죽음의 항해에서 살아남은 우리 해기사들의 ‘대양을 건너는 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해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9. 한국해운 외양항해 초기의 일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6.25전쟁을 겪고 다시 사회의 혼란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간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한국 해운은 아직 초보 단계에 불과했다. 일본으로부터의 반환선박 몇 척과 미국으로부터 대여선들과 그리고 정부도입선 몇 척이 외양해운을 위하여 한국 해운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휴전으로 전쟁이 끝나고 다시 평화 정국이 찾아오면서 국가가 국민을 위하여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일은 생필품 확보였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부서진 상황에서 수많은 원조물자가 들어왔는데 그 운송을 대부분 외국 상선들이 실어 날랐다. 국가경제와 해운의 원리에서 보면 원수의 국가 일본은 어쩔 수 없는 이웃이었다. 그것이 당시 견뎌야 했던 한국 경제의 현실이었다. 전후에 원조국의 원조물자만으로는 생필품이 부족했던 한국은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했다. 당시 한국 해운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무역을 했고 드물게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취항한 일도 있지만 한일 항로 취항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물론 수출품도 있었지만 수입량에 비하면 엄청난 무역수지 적자였다.



그러므로 부산항이나 인천항의 부둣가에 서서 입출항하는 외국 선박들을 바라보는 한국 해기사들의 답답한 가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해방이 되고도 여러 해가 지났는데 왜 우리 항구에는 외국 선박들만 바글거리는가? 저기 희희낙락하며 부두 출입구를 들락거리는 외국인 선원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다간 구한말에 전국의 개항항을 외세(특히, 일본)에 내주던 그때처럼 또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그리고 다시 식민지 신세가 되지는 않을까? 이와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해방 정국과 6.25전후 복구상황에서 해운 해기인들이 갖는 우리 바다의 위기에 대한 경각심은 한결같았다. 그들은 우려, 의구심과 함께 다시는 그때처럼 바다를 내주지 않겠다는 결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치단결하여 우리 스스로 일어서서 ‘자강’의 해운을 세우는 일에 동의하고 있었다.



우리 힘으로 우리 해운을 해 보자는 시도는 구한말에도 있었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문명개화’ ‘부국강병’을 위하여 근대화에 골몰하고 있었는데 해운이 근대국가의 기본임을 깨닫고 당시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직한 새로운 정부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이나 전국 조곡운송을 맡은 전운국으로 하여금 해운을 경영하게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영해운이 실패하자 관이 감독하고 민이 운영하는 ‘이운사’라는 해운기업을 설립하여 운영하게 했지만 이마저도 결국은 실패했다. 이러한 와중에 선박사관을 확보하기 위하여 청국으로 유학생을 보낸 일도 있고, 일본으로는 한만원, 박종서, 신순성 등을 해기 유학 파견했는데 이들 중 신순성만이 졸업 후 현업에 취업하여 조선인 해기사의 상징이 되었다.



한 국가가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해운’이 필요하고, 근대국가에게 해운의 성립은 대개 관영이나 관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국책기업으로 시작한다는 경험적 사례는 근대화가 외부로부터의 압박에서 시작된 청이나 일본이나 조선이나 모두 일치했다. 그런데 조선의 한반도는 시작부터 주변국들의 간섭을 받으면서 관이 주도하는 경제활동의 경직성에다 그들이 제공한 차관이라든지 동업이라든지 용선계약과 같은 해운 특유의 경영활동에 있어서 그들(주로 일인들) 해운 해기인력의 불공정한 활동이 많았다. 그리고 일본이 한반도를 병합할 즘에는 이미 우리의 해운은 송두리째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니깐 해방 되고 국내 소수의 해운인들과 태평양전쟁 중 죽음의 항해에서 살아남은 해기전문인들이 시도한 해운을 일으켜 국가의 근간을 세우겠다는 이름하여 ‘해운입국’은 구한말에 이어 제2편인 셈이 된다. 이것은 확실히 최상의 선택이었다. 한반도는 해방 되고 나서 한 마디로 말한다면, 아무것도 없었다. 일제가 전쟁을 치른다고 가정집에 밥숟가락 젓가락까지 쇠붙이란 쇠붙이는 죄다 공출을 해 가 그 수탈이 극에 달했다. 그러고 나서야 해방이 찾아왔다. 해방을 즈음하여 강대국들의 계산은 복잡했다. 1945년 8.15 이후 한동안은 사회는 해방의 기쁨만이 확실할 뿐 모든 것이 안개 속처럼 희미했다. 미군정이 선포되고 미국은 한국에 원조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하여 자기들의 선박을 제공했다. 그 선박들은 주로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을 수행하면서 건조한 ‘전쟁표준선’인데 이들 중 다수의 전쟁표준선이 한국에 원조 또는 대여 방식으로 제공되었다. 이로써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외교적 의지는 확고해지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박건도 2018-11-12 09:13:04
모르고 있던 사실을 많이 알게된 것 같습니다. 글을 읽을 때마다 지식의 폭이 점차 넓어지고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