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3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3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0.30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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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인천항에서 홍순덕 선장이 일인들로부터 강제 인수한 ‘부산호’. 부산과 인천을 운항중 1947년 다도해의 암초에 좌초된 것을 정인락 선장이 인양하여 부산항으로 회항하던 중 다시 침몰해 가라앉았다.
1945년 10월 인천항에서 홍순덕 선장이 일인들로부터 강제 인수한 ‘부산호’. 부산과 인천을 운항중 1947년 다도해의 암초에 좌초된 것을 정인락 선장이 인양하여 부산항으로 회항하던 중 다시 침몰해 가라앉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해기사들은 조국이 해방을 맞자 해군과 해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는데 많은 해기사들이 해군에서 활약했다. 해운 영역은 크게 해운기업, 해운행정, 그리고 해기교육기관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우리로서는 한 번도 시도되어 본 적이 없는 ‘아무도 가지 않은 황무지’ 길이었다. 그야말로 개척자적이고 선구자적인 사명감만이 해 낼 수 있는 험한 길이 예고되고 있었다.

다음에 소개되는 인물들은 근현대 한국해운의 개척기랄 수 있는 해방 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 혼란과 혼돈, 격변과 빈곤 속에서도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노력과 희생을 아끼지 않은 인물들이다. 이들 중 어떤 이는 육상에서만 활동한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가 악조건의 해상에서 근무하면서 조국의 해양국가 성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특별히 한국 해운 건설 초창기에 사익을 포기하고 오직 공익만을 위하여 몸을 던진 육상 해운인들과, 폐선에 가까운 노후된 항해선에서 악조건의 노동을 견뎌낸 ‘해기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제 생존해 있지 않는다.

한국근현대해운건설의 아버지들 : 황부길, 이시형, 윤상송, 이재송, 김용주, 신성모, 박옥규, 홍순덕, 유항렬, 권태춘, 전덕준, 방상표, 정해춘, 정인태, 김원탁, 지석남, 성철득, 석두옥, 양우갑, 오세윤.

이들의 활약상은 이후 본문에서 자세히 서술될 것이다.

8. 바다의 오랜 잠에서 깨어나다

그들이 돌아왔다. 오랫동안 바다에서 떠돌면서 침몰되지 않고 살아남은 그들이 마침내 돌아왔다. 바다에서 그들은 누가 말해주지 않았지만 어떤 소리를 들었고, 누가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 무엇을 보았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무엇인가 많은 것을 터득했고 영리해져 있었다. 확실히 바다에서 그들은 들었고, 보았고, 배웠다. 바다에서 그들은 무한 팽창해 가던 일본의 영욕성쇠를 경험하면서 과학기술이 무엇이며 문명이 무엇이며 근대화가 무엇이며, 그리고 국가에게 해양이란 무엇인가를 똑똑히 배웠다. 대양을 건너면서, 점령국 일본의 해운에 편입되어 이 항구 저 항구를 떠돌며 그 숱한 일장기를 게양한 화물선을 목격하면서, 항해실에서 기관실에서 외로이 항해당직을 서면서, 미 잠수함의 공격에 의해 수송선단이 와해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파도처럼 밀려가며 바깥으로 확장해 나가지 않으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외세의 힘에 의해 조국은 그 인민은 멸망하고 점령국의 비참한 노예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또 명심했다. 그들은 신생 조국이 해양국가가 되길 원했다.

광복 후 한국 해운은 1945년 10월, 인천항에 정박한 부산호를 접수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미군정 적산 기업 조선우선을 인수받은 김용주 사장은 선장 홍순덕으로 하여금 부산호 접수를 지시했다. 전쟁으로 보유 선박 모두가 멸실되고 남은 선박은 오직 부산호 1척뿐인데 만약에 이마저 남아 있는 저들이 배를 몰고 출항해 버리면 조선우선은 빈껍데기가 된다. 부산호 인수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어떤 신사가 배로 찾아왔다. 그는 홍순덕에게 보자기 하나를 전달했다. 그 속에는 태극기가 있었다. 그는 이 태극기를 부산호에 게양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의 이름은 신태범. 자신은 구한말 최초의 조선인 선장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아버지는 광복되기 수년 전에 작고하셨는데, 이 태극기는 한일합방 시 광제호에서 내려진 태극기로서 그 동안 아버지가 귀하게 보관해 오다가 돌아가시면서 아들인 그에게 유물로 남겼다고 그 내력을 밝혔다. 홍순덕은 선미갑판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구한말 대양을 건너는 꿈을 꾸었던 외롭고 쓸쓸했던 조선인 청년 신순성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일제가 벌인 태평양전쟁에서 한국인 선원이 약 100여명 희생되었는데 그 중에 9~12명 정도가 해기사이다. 10명 남짓한 인원이란 것이 전체 전쟁의 규모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몰라도 이제 독립을 쟁취할 신생 조국의 해운을 생각한다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 때 동원된 선박의 죽음의 항해에서 살아남은 해기사는 1백여명, 이 인원으로는 당장에 8~9척만을 운항할 수 있는 정도이니 단 한 명이라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광복 후 한국 해기·해운의 주축은 일제강점 하 해기교육기관이었던 진해고등해원양성소 출신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고등해원양성소의 별과 출신자들 수십 명과 일본 해기유학 출신 해기사들이 10명 남짓 있었다. 광복 후 한국 해운이 출범하고 진해고등해원양성소 출신자들은 상당수가 해군 쪽으로 진출했다. 당시에는 유일한 해운 기업인 조선우선이 충분한 선박을 보유하지 못했고 미국의 원조 선박이 해군 쪽으로 많았고 한국 해군의 창설자인 손원일이 유눙한 해기인력을 해군으로 영입하기 위하여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결국 진해고등해원양성소 출신자의 과반수가 해군에 진출했고, 나머지 인력이 일본 해기유학파와 진해고등해원양성소 별과 출신자들과 함께 해운기업과 해운행정과 해운계 교육 분야를 담당했다. 신생 조국의 해운건설을 위하여 ‘해기’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일본이 물러난 후 쓰다 버린 찌꺼기처럼 남겨진 그들의 해운 유산이었지만 우리 해기 해운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서울 남대문 근처에 소재한 조선우선 사옥이나 근처 커피숍에 모여서 당면한 현실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선박 확보가 문제였다. 일제 치하에서 한반도 해운을 경영하던 조선우선의 선박이 전쟁으로 상당수가 멸실되었고, 남은 선박도 그들이 철수하면서 가지고 가 광복 후 해운을 할 만한 선박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 문제는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갈증이 약간이나마 해소되었다. 미국은 조선의 복구를 위하여 원조물자를 실어 나를 전쟁표준선(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건조한 5천여 척의 군함)을 무상 또는 저렴한 임대료로 원조해 주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소재였던 선박의 반환 문제도 적극 추진하여 몇 척의 선박을 돌려받았다.

광복 후 초기에 해운으로 실어 나른 화물은 상당 부분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물자였다.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국의 원조물자가 부산항과 인천항으로 들어왔는데 화물의 원활한 양륙을 위하여 부서진 항만의 복구 작업도 함께 진행되었다.

초창기 한국 해운의 가장 큰 희망은 풍부하고 수준 높은 해기인력이었다. 광복되고 이듬해 1월에 외양항해에 승무 가능한 선박사관들을 양성할 ‘진해고등상선학교’(이 학교는 그 후 진해해양대학, 조선해양대학, 국립해양대학, 한국해양대학, 한국해양대학교로 개명되며 발전해 갔다)가 설립되었는데 전국 유수의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학교는 그로부터 2년 6개월 후부터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당시 미 전쟁표준선(이하, 전표선이라 부른다)의 원조로 증가된 선척에 자리를 메웠다. 초창기 진해고등상선학교의 진로는 매우 험난했다. 광복 후와 6.25전쟁의 혼란 정국에서 학교는 여러 차례 폐교 위기를 맞았지만 창립자인 이시형과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학맥을 이어갔다. 그 외에도 해기사 양성 교육기관으로 통영해원양성소, 목포상선수산학교가 있었는데, 목포상선수산학교는 나중에 목포상선고등학교, 목포해양고등학교, 목포해양고등전문학교, 목포해양전문학교, 목포해양전문대학, 목포해양대학, 목포해양대학교로 개명, 발전하며 한국해운계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광복이 되고 한국 해운에게 시급한 문제는 무엇보다도 해운 문제를 총괄할 전문 행정기관의 성립과 운영이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점령 통치하면서 해운 행정을 담당할 인재를 하나도 육성하지 않았다. 일제 치하에서 해운 행정을 경험한 해기인은 교통국 해사과에서 근무한 전덕준과 김원탁이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하급직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해운은 행정에 있어서 거의 제로 상태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8년에 정부수립 되고 교통부 장관이 해운국장으로 영입한 조선우선의 해기사 황부길은 어쩔 수 없는 인사 결정이었다. 10여 년간을 승선생활만 해 온 황부길이었지만 그 외에는 대안이 없는 한국 해운의 현실이었다. 그렇지만 황부길은 해운국장 직을 수행하면서 선구자적인 사명자적인 자세로 맡은 임무를 훌륭하게 처리해 나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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