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주체는 ‘겨레’
우리 역사의 주체는 ‘겨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0.30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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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까지의 각급학교 교과서에서는 “우리 역사는 우리 민족이 살아온 발자취”, “국사는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생활의 실체를 밝혀주는 과목으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구실을 한다”고 하여 우리 역사의 주체가 ‘우리 민족’이라고 했다. 그러나 2009년 이후의 교과서에서는 “한국사는 한국인이 걸어온 궤적” 등 우리 역사의 주체를 ‘우리 민족’ 대신 ‘한국인’이라고 한다. 이유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교과서에서 ‘민족’이라는 단어가 거의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 역사의 주체를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 우리나라에는 ‘민족’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민족’이란 말은 일본사람들이 19세기 후반, 영어의 ‘nation’이나 ‘ethnic group’을 번역하면서 만든 용어로 알려져 있다. 그 후 ethicity, ethnos, tribe, group 등 뜻이 약간씩 다른 서양 용어의 번역어로서도 사용되다보니 그 개념이 명쾌하게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서구에서도 ‘nation’이란 단어가 처음에는 ethnos나 tribe 등 혈연과 지연을 중시하는 ‘종족’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 자본주의화의 영향으로 점차 경제·정치 생활이 강조되면서 ‘하나의 정치조직 아래에서 경제·문화 활동을 하는 집단’이라고 하는 현재의 ‘국민’과 거의 같은 의미로 변화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학자들은 서구 학자들의 주장을 은연중 따르면서 혈연을 중시하는 우리 민족의 바탕 정서도 챙기려는 어중간한 입장이지만, 다수의 국민들은 혈연을 더 중시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민족의 역사를 말하려면 그 출발점인 ‘민족’의 형성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민족의 개념 자체가 정립되어 있지 못하니 그 형성 시기에 대해서도 고조선과 동시, 고조선 후기, 신라 통일기, 고려 때, 세종 때, 19세기 등 의견이 다양하여 교과서에서도 명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윤내현의 ‘무리사회 단계에서는 씨족 단위, 마을사회 단계에서는 부족 내지 부족연맹 단위, 고을나라 단계에서는 종족 단위로 생활하다가 고대국가 단계가 되어 단결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이 ‘민족’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된다. 결국 우리 민족은 고조선의 건국과 동시 또는 직후에 형성된 것으로 본 것인데, 사회학자인 신용하를 비롯한 다수의 학자들도 ‘고대국가가 먼저 서고 그 속에서 단결 공고화 정책에 따라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서구 학자들의 논리를 따른다.

나는 이런 주장에 대해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혈연, 종교, 풍습, 언어, 경제생활, 정치조직, 문화, 공동체의식 등을 민족의 공통적 특징으로 들고 있는데, 신용하 교수는 ‘장기간의 큰 군사적 충돌’이라는 기준을 하나 더 넣고 있다. 나는 신 교수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본다. 장기간의 군사적 충돌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같은 편끼리 단결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므로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의식이 형성되었을 것이며, 이 ‘민족의식’을 가진 공동체(=민족)를 바탕으로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학자들이 말하는 여러 공통요소 가운데 가장 공통성이 강한 ‘혈연’은 국가에서 강화시켜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말에는 ‘민족’과 비슷한 의미의 ‘겨레’라는 말이 있다. 박현이 ‘결애’, 즉 ‘결(혈연을 바탕으로 한 공통문화의 흐름)을 같이하는 생명체라는 의미’라고 해석했듯이 혈연성이 강조되는 말이다. 현 초등학교 사회 5-1 교과서 첫 장에서 ‘하나 된 겨레’라고 한 외에 겨레라는 단어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역별로, 시대적으로, 계층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하는 ‘민족’이라는 용어보다는 ‘기본적으로 혈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하여 공동체의식을 갖게 된 조직’이라는 의미가 강조되는 ‘겨레’라는 용어를 우리 역사의 주체로 사용할 것을 제의한다. 그러면 겨레를 바탕으로 국가가 형성된다는 논리도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박정학 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역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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