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李觀述)’과의 만남
‘이·관·술(李觀述)’과의 만남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0.28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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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李觀述)’이라면 울산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생경하게 들릴지 모른다. 집안사람들조차 입 밖에 내기가 두려운 존재라면 알만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엄연히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 출신이고 일제강점기∼해방직후의 역사적 공간에 큰 획을 그은 거목이었다는 사실(史實)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필자에게도 그는 귓가를 스쳐지나간 소소한 인물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의 체취를 가까이서 맡아볼 기회가 생겼다. H고 동문모임 ‘민학(民鶴)’에서 마련한 역사기행(‘근현대 울산을 돌아보는-’)에 동참해 보라는 권유를 하루 전에 받았던 것.

궁금하던 차에 인터넷을 뒤졌다. 두 ‘-백과’의 설명이 조금씩 달랐다. 생몰(生歿) 시점부터 어긋났다. 한쪽은 ‘1902년∼1950’인데 다른 한쪽은 ‘1900년∼?’이었다. 길이도 여느 저명인사들과는 비교할 정도가 못 됐다. 그의 이름이 우리 사회에서 오랜 세월 금기어(禁忌語)였음을 직감케 했다. ‘위키백과’의 신상 털기는 다음과 같았다. "출생=1902년 울산, 사망=1950년 골령골, 국적=대한제국∼대한민국".

민학의 역사기행은 토요일(27일) 오후 울주군 범서읍 선바위공원 주차장에서 시작됐다. 기행에는 18명이 참여했고 길잡이는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1987’ 사무국장이 맡았다. 집결장소는 이관술 추모비가 세워져 있던 자리였다. "세운 시기는 YS 때이고 비문은 언론인 J씨가 썼을 겁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갔다. 소문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빨갱이 비석, 말이 되냐’며 뽑아내 근처 어딘가에 묻어버린 탓이다.

이관술의 흔적을 더듬는 일행의 발길은 차도 건너 입암마을 그의 한옥 생가로 향했다. 예부터 기후가 좋고 땅이 기름져 별칭이 ‘부촌(富村)’이었다는 입암 들녘은 누렇게 익은 벼들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입암길 44-1’ 팻말이 나붙은 그의 생가는 인적이 드문 탓일까, 을씨년스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배 국장의 해설이 실타래처럼 풀리는 동안 필자는 잠시 한눈을 팔기로 했다. 옛 주인의 발자취를 옆뜰 바닥에 나뒹구는 홍시 한 입만큼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쓸쓸함, 허전함뿐이었다. 뒤란 난쟁이나무에 탱자만큼만 자랐다가 말라비틀어진 석류열매 몇 알이 전해주는, 양희은의 노랫말 같은….

잠시 위키백과 속의 ‘이관술’ 키워드를 간추려 보았다. ‘일제강점기의 교육인·언론인·사회운동가·노동운동가,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남조선로동당, 대한민국의 정치인·언론인·사형된 사람·총살된 사람·울산광역시 출신·경성코뮤니스트그룹·경성트로이카…. 이 엄청난 이력의 일대기를 정리하는 사람은 인내심 하나는 대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는 일제에 굴하지 않은 지조 높은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그가 남긴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은 그의 ‘집안사람들’에게 모진 인고의 세월을 강요했고, 함구(緘口)가 상징하는 그들의 정신적 고통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래도 세상 분위기는 빠르게 변해 간다. KBS는 27일 밤 ‘천상의 컬렉션’에서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 무장항일투쟁에 앞장선 윤희순 의사(여, 춘천 출신) 이야기를 부각시켰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란 말까지 곁들이며….

역사기행은 새로운 지식을 선물했다. 이관술에게 무기징역의 올가미를 씌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미군정청의 작품이었고, 이관술이 복역하던 골령골(현 대전시 낭월동)에서 한국전쟁 직후 즉결 처형된 이후 시신도 못 찾고 있으며, 입암마을 사람이나 친인척 상당수는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사실도 그중 하나였다. 이날 뒤풀이에서 ‘독립운동가 이관술’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말에 반론을 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김정주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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