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보는 울산 청동기문화
키워드로 보는 울산 청동기문화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0.25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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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셋째 주말에 회야강 둔치에서 ‘우시산국축제’가 열렸다. 유등 행사, 뗏목 타기, 마두전을 비롯하여 각종 문화행사를 웅촌에 사는 예술인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한 축제이다. 이 축제는 삼국시대 이전에 검단리를 중심으로 웅촌지역에 존재했던 ‘우시산국(于尸山國)’을 기리는 행사이다. 이를 추진한 측에서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우시산국’은 초기 신라를 위협할 만큼의 세력이었음이 청동솥 등 출토 유물이 말해준다”며 “울산의 잠재적 문화관광지로 떠오를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웅촌지역에 진한의 소국이었던 ‘우시산국’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대마을에서 검단리까지가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양산의 웅상읍까지 그 세력이 뻗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우시산국’ 이전인 청동기시대 사람들도 이곳에 살고 있었다. 주로 하대마을과 검단리를 중심으로 보는 것은 이 주변에서 지석묘군과 고분군, ‘검단리 유적’ 등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시산국’은 몇몇 유적이 발굴되었을 뿐 정확한 위치나 규모를 알 수 없음에도 ‘울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 때문에 그 나름의 의미가 크다.

‘우시산국’은 기원후 80년에 사로국 탈해 이사금에게 정벌되었다. 한편 굴화리 주변에는 ‘굴아화촌’, 혹은 ‘굴지화국’이 존재했다. 이곳은 태화강을 끼고 있으며 강이 휘어 있다는 의미로 ‘굴아(屈阿)’라는 글자를 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언양읍 주변에는 ‘거지화촌’으로 불렸던 ‘거지화국’이, 서생 주변에는 읍락의 형태인 ‘생서량촌’이 위치해 있었다. 부산지역의 ‘거칠산국’을 포함하여 모두 ‘거도’ 장군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이후 신라의 세력 아래 자치권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지역에서는 모두 후기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다.

대곡박물관에서는 이 청동기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전시회가 금년 연말까지 열린다. 주제는 ‘키워드로 보는 울산의 청동기 문화’이다. 그 키워드라는 것이 울산 청동기시대의 문화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울산식 집자리, 검단리식 토기, 환호 취락, 작은 논, 가옥 묘, 장식간 돌검, ‘ㄱ’자형 돌칼, 함정’ 등이다. 한국 청동기문화의 메카인 울산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의미가 깊다. 보고 또 보고, 설명에 귀 기울일 뿐 식견이 부족한 내가 다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발굴 문화재가 개발의 걸림돌로 인식되는 풍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울산의 청동기 유적 중 ‘검단리 유적(사적 332호)’은 그 핵심이다. ‘울산식 집자리’의 가장 큰 특징은 네모꼴의 집자리에 지형적으로 낮은 부분 쪽으로 배수구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불 땐 자리나 기둥 구멍도 특징에 해당한다. ‘검단리식 토기’는 깊은 바리 모양의 무문토기에 ‘낟알문’이 새겨진 토기를 말한다. 울산, 경주, 포항 등 동남해안지역 외에는 발견되지 않는 지역성이 매우 강한 토기이다. ‘검단리 유적’을 남겼던 후손들이 ‘우시산국’을 세웠고, 은현리 적석총의 주인공이 그 무렵의 세력자인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상상도 해본다.

이에 대한 학술대회가 보름 전에 울산박물관에서 열렸다. ‘울산지역 청동기시대 연구 성과의 쟁점’을 주제로 다루었다. 온종일 진행된 이 학술대회에 참석한 다수 시민들은 거의 자리를 뜨지 않았다. 연구자들의 발표와 토론 내용들이 어렵기는 했으나 흥미진진한 부분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산지역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청동기 유적을 보유한 곳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청동기 유적이 70여 곳에나 되고 무덤만 하더라도 3천여 기나 된다.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의 암각 문양도 이 시대의 범주 안에 들어있을 것이다.

울산지역에서는 청동기 중반까지 취락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천년도 훨씬 더 지난 조선시대 초기에 울산의 인구가 불과 4천 명 이내인데 그 무렵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울산지역 청동기시대의 종말’을 주제로 발표한 울산문화재연구원 이수홍 팀장은 “특정 유구나 유물의 탐색만으로 청동기시대의 종말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담아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안정적 식량 확보를 위해 옮겨 다녔던 것으로 보아 후기 청동기에는 농경보다 수렵 위주의 사회에 가까웠다는 견해도 나왔다.

청동기시대의 울산에 대한 견해가 모두 일치하지는 않는다. 오랜 세월이 지난 선사시대의 모습은 발굴된 유적과 유물을 통해 단지 추정하고 유추해 볼 뿐이다. 청동기시대의 연구 성과와 쟁점은 늦게까지 이어졌지만 여전히 많은 미스터리를 남긴 채 끝이 났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유적지 발굴 성과가 추가로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안재호 교수의 발언이 귓가에 맴돈다 “고고학은 골동품만 캔다는 시각에 머물러 있다. 통합적 자료를 토대로 한 ‘교류와 생계’ 등 본질적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고고학자의 의무이다.”

이정호 수필가, 울산학포럼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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