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2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2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0.23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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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기관 실습 중인 진해고등해원양성소 학생들. 그때나 지금이나 해기인력은 현대국가 운영의 동맥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바다의 교역로를 이용함이 없이 국가경제를 생각할 수 없고 해기인력 없이 국제무역을 계획할 수 없다.
선박기관 실습 중인 진해고등해원양성소 학생들. 그때나 지금이나 해기인력은 현대국가 운영의 동맥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바다의 교역로를 이용함이 없이 국가경제를 생각할 수 없고 해기인력 없이 국제무역을 계획할 수 없다.

 

전쟁 말기에 들자 일제는 군수물자 부족으로 공출을 강요하고 무기를 제작하기 위하여 쇠란 쇠는 다 끌어 모았는데 가정집의 놋쇠 밥그릇과 숟가락 젓가락도 모두 빼앗아 갔다. 바다에서는 쓸 만한 상선들 중 상당수가 가라앉았고, 나중에는 배가 부족해 폐선에 가까운 노후선을 남방 항로에 띄웠다. 그와 같은 배는 애초부터 수송항해가 무리였다. 그 배들 중에 기관고장을 일으킨 배의 승무원들은 침몰 직전에 탈출하여 남방의 이름 없는 무인도에 상륙했지만 식량을 구할 수 없어 겨우 쥐 같은 것을 잡아 연명했다는 증언도 있다.

바다에서 참으로 긴박하고도 지리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망망대해 무원고립한 바다라는 광대한 자연공간에서 경험되고 있었다. 맑은 열대 바다에서 낮에는 뜨거운 태양에 밤에는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누구에게나 성찰하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침략자에게는 진지한 자기반성을, 그리고 피점령인에게는 자기정체성의 물음을 바다는 던지고 있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대양에서는 그렇게 제각각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간이 흘러갔다.

바다가 품는 ‘물의 심상’은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작용하는 보편적 심리현상, 그 하늘 아래 같은 공기로 숨을 쉬며 살아가는 존재들이 갖는 대자연과의 심리적 공명이 있게 마련이다. 무원고립, 그러면서도 변화무쌍한 바다공간에서 그들은 인간의 유한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들은 신기루처럼 지는 일몰을 바라보면서 피안의 세계를 동경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열대 잿빛 바다를 지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드나드는 희랍 신화의 뱃사공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육지를 떠난 지 오래이고 여전히 바다인 삶의 공간에서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오늘도 요정 시레네우스는 노래를 부르며 바다사람을 어딘가로 불러내는 것이다. 차라리 그런 착각과 혼돈이 지금의 불안 고통을 잊게 하는 것이리라.

한편으로 바다는 모든 생명들의 모태였다. 거기서 인간은 태어났고 불순하기 짝이 없는 흙에서 자라난 것이다. 저기 해면에서 물을 뿜는 거대한 생명체를 보아라. 얼마나 순수하고 장엄한가. 그들이 태어나고 자라나게 한 바다는 그들을 위하여 수많은 생명체를 희생시켰다. 그러면서도 바다에서는 어떤 불평도 불만도 없이 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다이다. 바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저들은 대관절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우리를 이렇게 지휘하는가? 누가 우리를 이곳으로 오게 하는가? 이것은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그들은 왜 전쟁을 하는가? 왜 우리는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가? 왜 저들은 대륙으로 침략해 들어갔으며 동남아시아로 확장하면서 식민지를 넓혀 나갔는가? 미국과의 전쟁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수많은 의문들이 스쳐갔음이 확실하다. 일본으로 해기유학을 한 조선인 해기사들은 더더욱 그랬다. 지금 한국의 학제로 치면 고졸 이상 학력이 입학할 수 있는 도쿄고등상선학교와 고베고등상선학교는 일본인들도 매우 우수한 인재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해기 교육기관이었는데 나중에 해방 정국과 6.25전쟁을 전후한 기간 동안 한국 해운을 위하여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황부길, 이시형, 윤상송, 이재송 등이 여기를 수학했다. 그들은 사회 전반에 걸쳐 근대화를 이루며 산업사회가 되어 가던 일본사회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 식민제국주의의 정치철학과 국가이념이 해양활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학교에서의 수학과정 중에서, 그리고 해운기업에서 승선실습하며 우수한 저네들의 해기 과학 기술(당시 해기 과학 기술은 가장 최첨단 기술 중의 하나였다)을 경험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조선인으로서의 자존, 자부심을 결코 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훗날 신생 조국에서의 해기, 해운 활동을 정리하고 기록한 그들의 어록에서 잘 확인된다. 그들은 모두 한국의 해운건설의 아버지였다.

‘해기’에게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일본은 망할지라도 조선에게는 해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일본 해기 유학파들과 조선의 해기 교육기관 출신자들 중 태평양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일본이 패망해가는 바다를 떠돌며 언젠가 찾아올 신생조국의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일제 말기, 시대의 징후는 가장 먼저 바다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7. 한국 근현대 해운건설의 아버지들

근대를 향한 문명화가 시작되던 구한말에 해운, 해기가 발달하지 못한 데에는 이 분야에 대한 사회일반의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다. 조선의 문명개화 부국강병을 위하여 고심하던 고종과 조정은 해운의 발달과 해기인력의 양성이 절실함을 깨닫고 국가 주도로 해운을 시작하고 선원 양성을 시도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통리기무아문이라는 행정조직을 설치하여 그 아문에 해운을 담당하는 기구를 두었고, 나중에 그것이 실패하자 조곡운송을 담당하던 전운국으로 하여금 해운을 담당하게 했다. 해기인력 양성을 위해서는 청나라에 기선 사관교육 유학을 보냈고, 군함으로 사용하던 양무호를 선원양성소로 하여 선원양성 모집을 공고했지만, 이 모두 그 효과는 미미했다. 이 모든 결과는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우리 민족의 해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중요한 실패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민족이 먼 바다를 건너 교역하는 해운활동을 멀리 하게 된 것은 대략 고려 말기 이후부터가 아닌가 추측된다. 명의 주원장이 중국 대륙의 실권자가 되자 그들은 바다의 문을 걸어 잠그는 해금정책을 펴게 되는데 이것은 당시 동아시아 바다를 활동무대로 삼았던 한민족 해상세력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새 왕조는 사대하는 명나라에 따라 바다를 멀리하게 되었다. 결국 이 땅의 대양을 건너는 해상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연안 해운, 섬과 섬 사이 섬과 육지 사이의 협수로를 항해하는 연안 해운만이 한반도의 해양활동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도 바다를 드나드는 이치는 잊지 않고 계승되었던 것인데 이 해기능력의 우수성을 조선 수군이 이어받았다. 임진왜란에서의 조선 수군의 탁월함은 우리 모두가 아는 바다.

조선 시대에 수군은 참 곤고한 직업이었다. 부역기간이 육군보다 배나 길었고, 선상근무뿐만 아니라 해산물 채취와 병선수리 등 여러 가지 잡역에도 동원되었으며 자손에게 물려주는 업이었기 때문에 딸을 가진 집은 수군인 집안에 시집을 보내길 꺼려했다. 이렇게 조선 땅에서 수군이라는 바닷일은 천대되었다. 조정과 사회의 이와 같은 홀대 속에서도 수군이 양성되어 임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은 전란 후에도 바다의 중요성을 망각할 만큼 왕조 자체가 바다와는 전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임진왜란에서 히데요시의 일본군이 바다를 건너온 것은 그 전에 멀리 대양을 건너온 전 세계로 해양팽창하던 포르투갈 상선대에서 전해 준 당시 세계 상황에 대한 정보와 가공할 전쟁무기인 조총에 힘입은 바가 컸다는 것을 파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다와 바닷일은 경시되었다. 조선은 국란 후에도 바다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결과 마침내 다시 외세는 바다로부터 넘어와 조선은 망국했다.

전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해운기업을 설립하고 해기인력양성소를 연 것은 전적으로 한반도 식민수탈, 그리고 대륙침략과 남방으로 동남아 해역권으로의 확장을 위한 해상수송 활동의 목적에서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해운기업은 조선우선 오직 하나였다. 그것은 조선총독부가 지정하는 명령항로(19곳)와 자영항로(1곳)로 유지되었다. 그들은 조선인의 해운업 진출뿐만 아니라 해운을 수행하는 주 인력인 ‘해기사’라는 전문 직업에 대해서도 조선인이 진출하는 것을 꺼려했다. 조선인의 일본으로 해기유학은 신순성 이후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이후에야 소수의 인원이 입학할 수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1919년 이후에 양성소가 설립되어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과 함께 입학이 허락되었는데, 이는 오직 그들의 정책의 필요에 의해 시작되었을 뿐이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바다에서도 적지 않은 해기인력이 수장되었다. 해상수송을 담당한 해기사들 중 사망자는 일본인만 5만여 명으로 추산되고 그 외 조선인 사망자도 다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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