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1)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1)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0.16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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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나가사키 앞바다 데지마 섬에 있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관. 일본 조정은 이곳에서 네덜란드와의 통상을 열면서 서구 문물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근세 나가사키 앞바다 데지마 섬에 있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관. 일본 조정은 이곳에서 네덜란드와의 통상을 열면서 서구 문물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들 한민족 해상세력은 나중에 새 왕조로 들어선 고려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고려 말에 대륙의 새 주인이 된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으로 대륙에서나 한반도에서나 활동을 거부당했고, 그러고 나서 이들 해상세력과 그들이 지닌 조선, 해기 기술은 자연스럽게 일본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 동의한다면 중세에 동남아시아에서 진행된 일본의 해상활동이 쉽게 납득이 된다. 조선이 성리학의 이념에 눌러앉아 민民을 ‘농자천하지대본’으로 의식화해 나갈 때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바다에서 후일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에너지가 될 해상활동과 무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근대 이전에 비록 제한적이었지만 일본은 서양의 문물과 만나고 있었다. 그들은 네덜란드로 하여금 나가사키 앞바다의 데지마 섬에 상관을 두고 교역을 허용했다. 과학문명화와 관련된 적지 않은 물품들이 나가사키로 흘러들어왔고 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유럽의 의학서적이 일본의 양식 있는 의사의 손에 전해졌다. 그 서적은 외과수술을 위한 인체해부도였다. 인체 내부의 근육과 장기조직을 묘사한 그림은 정밀했다. 아직 알파벳 글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림만 보아서도 인체의 구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어떤 충격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 때까지 중국 대륙에서 제작된 책을 기반으로 이해하고 있던 인체구성의 개념이 오류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까지 그들을 지배하던 중화세계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자연히 네덜란드 알파벳으로 기록된 문장의 번역이 필요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자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관심과 열정과 노력이 뒤따랐다. 상관에 입항하는 네덜란드 상인에게 묻기도 하고, 단어 하나를 번역하는 데에 며칠씩 걸리는 일도 숱했다. 결국 이들은 네덜란드가 전해주는 근대 유럽의 실용학문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또 당시 이들은 네덜란드와 유럽의 발전이 상당 부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열대권의 풍부한 산물과의 만남에서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훗날 일본이 식민제국주의 국가의 길을 가는 데에 근원적 상상을 제공했다.

일본의 동남아시아 열대 해역권에 대한 지정학적 야망의 과정은 대략 이러하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근대 이전부터 이미 동남아시아의 바다를 항해하며 교역에 참여했던 일본은 유럽의 대항해시대가 진행되면서 그들의 상선들과 만나고 있었다. 원자재와 풍부한 동식물이 있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에서 패권을 다투던 네덜란드와 영국의 전투에 일본 사무라이들이 네덜란드의 용병으로 참여하는 일들도 있었다. 여기에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중에 끌려가 노예가 되어 사무라이에 합세한 조선인들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열대의 해역권에서 교역과 전쟁의 형식으로 지정학적 영역을 확장해 가던 서구열국의 해상활동을 일본 상선의 사무라이들은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들 중 특히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은 네덜란드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 일원의 식민지와 교역주도권을 가지면서 수많은 원자재와 동식물을 본국으로 가져갔는데 이것이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이 근대화되고 자본주의 사회가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형적인 식민제국주의, 해양강국이었던 네덜란드가 손을 잡은 아시아 국가는 일본이었다. 17세기 중엽, 나가사키 앞바다 데지마 섬에 네덜란드 상관이 설치되고 일본은 부분적이긴 하지만 제도적으로 서양 문물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정기적으로 데지마 섬에 입항하여 쏟아놓는 네덜란드의 물품에 일본인 관리들과 상인들이 열광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전해 준 과학기술 문명의 결과물들은 오랫동안 중화中華에 머물던 그들의 세계관에 변화가 필요함을 깨닫게 만들었다. 당시 일본의 깨어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유럽의 실용적 학문을 연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훗날 일본이 근대화로 가기 위하여 메이지 유신이라는 사회 전반의 혁신을 단행할 때 정치가들과 사상가들의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 그들은 여기에 더하여 근대에 서구가 저지른 식민제국주의 국가의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겼는데 그 확장 침략의 제1순위는 한반도였다. 이 모든 일에 그들 식민 제국주의자들의 열대 바다, 열대 해역권에 대한 환상이 함께 했음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겠다.

네덜란드 상관이 있던 데지마 섬에는 정기적으로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멀리 대양을 건너 수많은 시간을 항해하여 이곳에 도착했다. 머리 색깔도 다르고 얼굴색도 하얀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왜 저렇게 위험한 바다를 항해를 하여 이곳까지 온 것일까? 이런 진귀한 물품들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들의 풍요로움은 어디서 왔는가? 열대 해역에 식민지를 두고 그 풍부한 산물을 본국으로 가져간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데지마 섬의 상관에서 교역을 하며 일인들은 그들 네덜란드 상인에 대하여 수많은 상상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교역한 물품을 가득 싣고 데지마 섬을 출항하여 다시 대양 항해를 떠나는 네덜란드 상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을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근대화 문명개화 식산흥업 부국강병 식민제국주의의 과정에는 서구 문명과의 만남과 더불어 열대 해역권에 대한 지정학적 학습과 문화적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중요한 수행도구는 수송을 담당할 선박과 해기인력이었다. 나라의 문을 열고 사회 전반의 혁신을 단행한 일본은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빠르게 성장해 갔다. 본격적인 과학기술 교육을 시작하고 산업화에 성공한 일본의 조선과 해운산업은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급부상했다. 일본 조선소가 건조한 대형 화물선들이 세계항로에 취항하면서 세계의 바다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서구 유럽의 해양국들뿐만 아니라 일본 상선대가 강력한 경쟁상대로 떠올랐다. 대륙으로의 대확장에 성공한 일본은 일본 본국의 해운에게는 세계항로에, 한반도의 해운에게는 연근해 항로로 역할분담하며 급성장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영역확장을 계속하던 1930년대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항로의 중계운하인 수에즈 운하에서 일본 국기를 게양한 상선을 본다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당시 운하를 통과하던 상선의 선원들은 배에 오른 이집트 상인(운하통과 시 이들의 승선은 불법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선실 복도에 주로 카페트와 특산물을 내놓고 상행위를 했다)들에게서 먼저 통과한 일본 화물선의 승무원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상호간의 정보를 공유하면서 나름대로 해양문화 선원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1941년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데에는 그들의 막강한 해양력에 의지한 바가 컸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일본의 상선과 해기인력은 군수물자 수송에 동시 징발되었다. 니혼유센, 오사카쇼센, 조선우선 소속의 수많은 상선들이 일본본토와 한반도에서 남중국해와 필리핀군도 인도네시아 해역을 오가며 곡물과 고무, 철광석, 석탄, 마그네사이트와 같은 원자재와 일본 본토로부터는 공산품과 전쟁무기를 실어 날랐다. 자연히 이러한 수송선들은 적인 미 해군의 피격 대상이 되고 있었다.

역사 공부치고는 매우 처절한 학습이고 혹독한 결과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 자국민에게나 식민지인 조선인에게나 실험해서는 안 되는 정치외교적 실험이 되고 있었다. 세상에 문명개화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겠다면서 아시아 전체 민들을 전쟁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다니! 거기에 쓸려간 조선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남방군도를 출발한 일본 수송선들이 가라앉는 빈도는 점점 더 증가하고 있었다.

당시 군수물자와 인명을 실은 일본 수송선은 미 잠수함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잠수함의 어뢰공격에 대응하기 위하여 구축함이 호위하는 선단을 이루면서 이리 저리 갈지자로 궤적을 그리면서 항진했다. 그러다가 한 척이라도 피격되어 침몰되는 것을 목격하면 선단은 분산되고 제각각 길을 갔다. 혹시라도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여 기적적으로 다른 배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이들은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일생을 살아야 했다. 일본 천황의 우상화와 인민들의 황국신민화의 정치신념과 사회적 기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선일체를 강요받으며 징병된 조선 해기사들은 일본의 전쟁을 위한 ‘개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의사진단서를 첨부한 질병 하선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진단 기간이 지나면 다시 승선을 해야 했다. 승선한 배에서는 일본인 선원과 조선인 선원의 미묘한 또는 노골적인 갈등이 상존했다. 대개 승선 해기사는 일본인(상선 1척에 10명의 승선 해기사로 보면 평균적으로 1명 정도, 많게는 2명의 조선인 해기사가 있었다), 보통선원은 조선인이었는데 이러한 갈등은 사관과 보통선원이라는 해기인력 특성상 내재하는 갈등과 맞물려 늘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승선 중 가장 큰 불안은 역시 적 잠수함의 어뢰 공격에 의한 전손 침몰이었다. 배가 갑작스럽게 침수되어 가라앉을 가능성은 언제라도 있었기에 그들은 죽음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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