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0)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10)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0.09 19:1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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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관급으로 제공되는 의복과 식사를 하며 기숙사에서 단체생활을 했다. 그들의 학교생활은 매우 빡빡했다. 아침 일찍 나팔수가 기상나팔을 불면 침구를 정리하고 연병장에 집합하여 인원점검을 받았다. 그리고는 아침 체력단련이 시작되었고, 몸에 흐르는 땀을 씻어내자마자 하루 일과를 위하여 학관으로 떠났다. 그렇게 시작한 수업은 오후 5시에 마쳤고, 방과 후에는 다시 체력단련을 위하여 정해진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했고, 저녁식사 후에는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순검이 있기까지 정숙하게 자습 분위기를 유지해야 했다. 그들이 매일 저녁마다 진행한 환경미화 작업에는 갑판청소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어떤 고통을 수반하는 노동행위였다. 예를 들면 나무로 된 마룻바닥을 닦아내는 데 있어서 물걸레로 닦고 나서도 물기가 남아 있으면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작업은 특히 추운 겨울날에는 고역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이 모든 일에는 불량한 결과에 대해서는 과실점이 주어졌고, 과실점의 정도에 따라 기합과 훈련이 뒤따랐다.



그들에게도 물론 황국신민화 교육은 실시되었다. 해군예비원령(전시에 선박과 함께 군에 동시 징발되는 승선복무제도)에 따른 군사교육이 병행되었기 때문에 황국신민 의식화교육은 더욱 철저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화교육에 선박사관이 되기 위한 ‘해기의식화 교육’이 추가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다음은 이 학교의 교가로서 중요 행사마다 불리어졌을 것이라고 가정할 때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불렀을까 궁금해진다.

 


교가는 그 주제 전개가 교가만이 지니는 이념, 의분강개, 나라에 대한 충성, 사명감, 개인의 각오 등을 담는 오늘날 한국의 해운계 교육기관에서 불리어지는 교가와 비교해 볼 때 큰 차이가 없다. 사실상 이 가사 자체만으로도 해운입국을 표방하는 국내 해기 교육기관의 교가로 삼아도 괜찮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가사를 일본어로 부른다면 문제는 좀 심각해진다(당시에는 일본의 식민 속국이어서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했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은 과연 누구의 조선인가? ‘나라’는 또 누구의 나라인가? 더군다나 일본인 조선인이 같은 학교를 모교로 삼으면서 불렀으니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바라는 내선일체가 아닌가? 참 답답한 현실이었다.

조선의 식민수탈과 대륙 침략을 위한 민간 해운기업으로 생겨난 조선우선은 처음부터 총독부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다. 당시 조선우선이 운영한 항로는 총독부의 명령항로와 회사가 운영하는 자영항로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명령항로였다. 중국대륙의 상당 부분과 동남아시아 해역권이 일본에게 점령되고 조선우선은 총독부의 전적인 지원과 보조금과 함께 회사의 경영은 크게 발전해 나갔다. 조선우선이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그들이 말하는 태평양전쟁-미국과의 전쟁으로 인해서였다. 1930년대 말부터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자 조선우선 소속 해기사들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해기사들도 점령국 일본의 전쟁을 위하여 참전해야 했다. 일본제국주의가 벌여 놓은 전쟁에는 이와 같은 해운기업의 정책적 운영이 있었고, 그 최전방에는 해상운송을 수행하는 선박과 해기인력이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의 팽창이 본격화 되던 1920년대 이후, 아시아의 바다는 일본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오대양 육대주의 세계 항로에 상선대를 운영하고 있던 일본은 한반도는 물론, 중국 동안과 남안,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로 그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다. 당시 그들의 해운력은 물론이고 조선기술도 세계최강이었다. 그때 벌써 1만t급 이상의 대형화물선을 건조했고 움직이는 기지인 항공모함도 만들어 냈다. 그들의 해양팽창은 이와 같은 막강한 해양력에 바탕을 둔 것이다.



태평양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일본은 아시아의 식민 각지에서 수탈한 원자재들을 선박으로 실어 날랐다. 쌀과 같은 곡물들이 산지에서 출하되어 선박에 적재되었고, 석탄과 같은 에너지 생산 원자재가 바다로 운송되었고, 철광석 마그네사이트 알루미늄 고무와 같은 것들은 일본 본토로 옮겨져 전쟁무기로 만들어져서는 다시 전장으로 해송되었다. 이 모든 것들의 수송의 최전방에 해기인력이 배치되었다. 일본이 미국과 벌인 태평양전쟁은 한편으로는 군수물자의 싸움이었다. 전장에 식량과 포탄이 보급되고, 전쟁무기와 군수품을 만들 공장에 원자재가 제대로 보급되어야만 버텨낼 수 있는 그런 싸움이었다. 전쟁 중에 아시아의 바다에서는 수많은 군수품을 실은 일본 상선들이 물속에 가라앉았다. 침몰된 상선의 수에 비례하여 육상의 해기인력 양성 교육기관에서는 신입생의 모집 정원도 늘어났고, 그것도 모자라 조기졸업을 시켜야만 했다.

근대의 바다에서 수송을 담당한 상선은 처음에는 군함을 겸용하는 항해선이었다. 그들은 적재능력과 감항능력이 뛰어난 캬라벨선에 막강한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유럽열강이 대확장을 꾀하던 대항해시대에 아시아와 신대륙의 해항 입구에서 대포의 위력을 과시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낯선 이방인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으려는 장차 식민 속국이 될 땅의 원주민들에게 유럽의 발달된 전쟁무기는 공포 그 자체였다. 신대륙 안데스 산맥의 인구가 수백만 명이었던 잉카제국이 200이 채 안 되는 총포로 무장된 유럽 병사에 의해서 멸망당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교역을 담당하는 상선이 군함의 기능을 더욱 발달시켜 나간 데에는 그들의 해양팽창으로 인한 세력다툼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항해시대 후반에 접어들어 그들의 교역선들은 지구상에서 만나지 않는 바다가 없을 정도로 충돌을 했고 그와 더불어 해전을 감행했다. 전 지구적으로 항로가 밝혀지고 위험을 감수하며 문을 두드려야 할 미지의 항구도 별로 남지 않은 수출과 수입이라는 무역활동이 예측가능한 시점이 되자 상선과 군함은 분업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전함 ‘야마토’. 1920년 이후 일본은 오대양 육대주의 세계항로에 상선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해운력은 물론, 조선기술도 세계최강이었다. 그때 벌써 1만t급 이상의 대형화물선을 건조했고 항공모함도 만들어 냈다. 그들의 해양팽창은 이와 같은 막강한 해양력에 바탕을 둔 것이다.
전함 ‘야마토’. 1920년 이후 일본은 오대양 육대주의 세계항로에 상선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해운력은 물론, 조선기술도 세계최강이었다. 그때 벌써 1만t급 이상의 대형화물선을 건조했고 항공모함도 만들어 냈다. 그들의 해양팽창은 이와 같은 막강한 해양력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구의 해양팽창에 일본이 숟가락을 얹었다. 근대화를 위한 일본의 시점포착은 절묘했다. 미국 페리함대에 의해 개항 당할 때만 해도 그들은 쇄국과 개국을 놓고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당시 일본지도층은 ‘문명개화’를 놓고 결론을 못 내리고 있었으며 실권을 쥔 막부는 지방 번주들과의 갈등에 시달리면서 나라 정치는 안정되지 못했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4개국 연합함대에 의해 그들의 해안기지가 형편없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손을 든 일본은 1854년 개항을 했다. 물론 불평등조약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미국으로 영국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고……, 마침내 메이지유신이라는 현대 일본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사회적 혁신을 단행했다. 입헌군주제 내각제로 새로 출발한 일본은 근대화 문명화를 향하여 교육혁신을 이루고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공장을 지어 공산품을 생산하여 식산흥업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갔다.



그렇지만 일본이 이렇게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일본의 성공이 해양국가로 지향한 데에 있다고 본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자질 형성은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4, 15세기에 이미 일본은 소규모이지만 일본 열도 남쪽으로 동남아시아와 교역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상선에는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사무라이가 승선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이들 해양세력은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라는 의문점이 남는다. 사학자 김성호의 주장에 따르면, 고려 말기 그때까지 흥업하던 중국 동안과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한민족 해상세력의 ‘조선造船, 해기의 계승’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사실 고대에 동아시아 국가 간 해상이동에서 일본은 그것을 수행할 선대도 항해인력도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일본 최고 지식층에 속하는 승려 엔닌의 ‘엔닌일기’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에서 충분히 입증된다. 약 10년간 동안 당시 선진국인 당나라로의 여행에서 그가 이용했던 선박은 모두 한민족 해상세력으로 표방되던 장보고 선대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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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도 2018-10-17 09:26:22
늦게나마 이렇게 좋은 글을 읽게 되었고, 이에 감명받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태규 2018-10-11 07:29:36
역시 작가님은 깊고 역사를 다각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감탄합니다. 매번 잘 보고 있습니다^^
벌써 다음 이야기도 기대가 되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