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의시네에세이]다(늘) 좋을 순 없는 이유-‘레트로 액티브’
[이상길의시네에세이]다(늘) 좋을 순 없는 이유-‘레트로 액티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0.04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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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슬립(time slip: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집단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을 거슬러 과거나 미래에 떨어지는 일)’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지금도 가끔 등장할 정도로 이젠 SF영화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런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자주 내세우는 철학이 하나 있다. 문제가 있는 현재를 고치기 위해 과거로 잠깐 돌아간 주인공들 대부분이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현재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는 것. 그러니까 등장인물 모두가 다 좋은 현재는 존재하기 어려웠다. 타임슬립 장르를 사실상 대표하는 작품인 <나비효과> 시리즈가 그랬고, 그보다 앞서 개봉한 <타임머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대중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작품들보다 더 일찍 개봉해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게 바로 ‘루이스 모노’ 감독의 <레트로 액티브>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에 개봉했었다.

영화는 인적이 드문 고속도로를 달리던 주인공 카렌(카일리 트래비스)에게 작은 충돌 사고가 일어나면서 시작된다. 카렌은 범죄심리학자다. 그녀는 얼마 전 발생한 인질극에서 범죄자들과 협상을 벌이다 실패, 인질들이 모두 사망하면서 사표를 쓰고 무작정 떠나온 상황이다. 하지만 딴 생각을 하다 그만 도로 표지판을 들이박으면서 차가 고장이 나 버린다.

다행히 지나가던 차가 한 대 있어 카렌은 그 차에 도움을 청해 견인차가 있는 곳까지 함께 동승하게 된다. 그 차에는 프랭크(제임스 벨루시)와 레이앤(샤논 위리)이라는 젊은 부부가 타고 있었다. 알고 봤더니 프랭크는 불법으로 고가의 컴퓨터칩을 팔아넘기는 악덕 사기꾼이었고, 그의 아내 레이앤을 모질게 학대하는 난봉꾼이었다. 그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카렌은 그들 부부와의 동행에 점점 불편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간이 휴게소에 들른 프랭크는 휴게소 주인으로부터 레이앤의 불륜사실을 알게 되고, 급기야 달리던 차 안에서 레이앤을 총으로 쏴 죽이고 만다. 그 다음 총구가 카렌에게 향하려던 순간 그녀는 극적으로 차에서 탈출하게 되고, 미친 듯이 도망치다 시간 역행 시스템을 연구하는 가속화 연구소에 당도한다. 실수로 시간 역행 구역으로 들어간 카렌은 예기치 않게 20분전의 과거로 다시 돌아가게 되고, 그녀에겐 돌이킬 수 없었던 살인사건을 막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하지만 극적으로 레이앤을 살리면 이번엔 그녀와 불륜을 저지른 남자가 죽게 되고, 또 다시 과거로 돌아가 레이앤과 그 남자를 살리면 애꿎게도 아무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영화기술적인 면에서 <레트로 액티브>는 촌스러운 작품이다. 어설픈 CG(컴퓨터 그래픽)가 난무한다. 하지만 스토리만큼은 이후 개봉된 타임슬립 영화들의 교본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6년 뒤에 개봉한 <나비효과>도 이 영화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감히 짐작하고 있다.

그랬거나 말거나 중요한 건 영화의 설정. 이 영화나 <나비효과>나 현재의 문제와 관련해 뭐가 잘못된 건지 파악해서 과거로 돌아가 그것을 고쳤는데도 모두가 다 행복한, 완벽한 현재는 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일까. 까짓 거 영화일 뿐인데 영화 속에서라도 그런 유토피아를 한번 쯤 구현해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실제로 <나비효과>를 처음 봤던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했었더랬다.

하지만 나도 마흔을 넘기니 이젠 그런 설정이 이해가 좀 된다. 영화의 재미를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내 삶 자체가 이미 다(늘) 좋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좋지 않았던 때가 더 많았던 거 같다. 상대성이론 탓인지 행복은 너무 좋아서 늘 순식간에 지나가버렸고, 고통은 단 1g도 시간이 아주 느려지더라. 결국 인생은 좋은 순간도 분명 많지만 아플 때도 있고, 그 때는 또 아파야 한다. 그게 엄연한 현실이다.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바로 그 냉혹한 현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닐까. 다들 어릴 땐 자기 미래가 반짝반짝 빛날 거라 착각하니까.

<레트로 액티브>에서 계속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바로 잡으려 했던 카렌도 결국 모든 걸 내려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얼마 전 인질을 구하지 못했던 자신도 비로소 용서한다. 차라리 그건 신에게 어둠까지 왜 만드셨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았으니까. 어이없게도 어둠이 있어야 잠도 잘 자고 삶의 에너지도 보충하게 된다. 그래서 살아있는 한 갖다 버릴 건 1도 없다. 결국은 다 약이 된다. 열심히 했는데도 왜 늘 문제가 생기냐고? 아이러니한 그 현실이 사실은 삶의 실체거든.

1998년 7월 11일. 러닝타임 90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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