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9)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9)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0.03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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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고등해원양성소. 본래의 이름은 ‘조선총독부체신성고등해원양성소’인데 당시 진해 해군통제부 역내에 있었다. 학교는 상선사관 교육을 위한 당시로서는 매우 수준 높은 교과를 수업했으며 규율과 훈련이 엄하여 입학생 중 적지 않은 인원이 졸업하지 못했다.
진해고등해원양성소. 본래의 이름은 ‘조선총독부체신성고등해원양성소’인데 당시 진해 해군통제부 역내에 있었다. 학교는 상선사관 교육을 위한 당시로서는 매우 수준 높은 교과를 수업했으며 규율과 훈련이 엄하여 입학생 중 적지 않은 인원이 졸업하지 못했다.

 

1905년 12월에 인천항에서 광제호의 취항식이 있던 날, 조정의 한 관리가 배의 현측에 나 있는 스커틀(선실의 밀폐식 창문)을 보고 “배에 웬 구멍을 이리도 많이 뚫어 놓았느냐?”라고 대성일갈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만큼 조선 조정은 해기와 해운에 무지했다. 그 후 광제호는 조선의 전 해안에 대한 세관감시선으로 쓰이기도 했고(이미 이 당시에는 세관행정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뒤였다), 등대순시선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1910년 한일병합 후에는 선박무선국의 중계국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조선총독부 소속 선원양성소가 설립되자 실습선으로 이용되었는데,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해외의 자국민들을 환국 수송하는 데에 이용하기도 했다. 조선 조정의 비용으로 귀하게 구입한 배를 일본은 한반도 식민 치하 내내 이용해 먹다가 패전하여 철수하는 마지막까지도 오직 그들을 위하여 운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일제 치하 조선 적 선박 반환 요구와 교섭이 있었지만 광제호는 반환되지 않았다.



신순성 이후 일본으로의 해기 유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병자수호조규라는 불평등계약에 대한 보상 차원의 1회성 파견유학이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원천적으로 조선인이 해운계 교육기관에 진학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인이 바다에 진출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일합병이 되고 조선총독부가 통치하면서도 한 동안 계속되었는데 1920년에 유항렬이 개인 자격으로 신순성이 졸업한 도쿄고등상선학교를 입학하고 졸업 후 돌아와서는 한반도의 두 번째 선장이 되면서 그러한 차별 정책은 다소 수정되었다. 거기에는 일본의 식민지 경략과 대륙 침략의 야욕이 숨어 있었다. 이후 1930년대에도 민간 차원의 해기 유학이 수 년 간격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일은 중세의 의식에 사로잡혔던 민民들이 문명개화에 눈이 뜨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들 중에는 나중에 해방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해운국장을 지낸 황부길, 광복되자마자 국내 최초로 해운계교육기관의 설립을 주도한 이시형, 대한민국 첫 해운기업 조선우선과 첫 국책회사인 대한해운공사의 실무를 주도한 윤상송, 광복 이후 혼란 정국에서 해운기업, 해운계 교육기관, 해군 등 한국 해양계의 여러 분야에서 해상 실무를 지휘한 이재송, 등은 이 때 개인의 자격으로 유학을 다녀온 인물들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도전적으로 당시로서는 일본 최고의 해운계교육기관인 도쿄고등상선학교와 고베고등상선학교에 수학하면서 피점령 민民의 설움을 참으면서 언젠가 회복할 독립 조국의 바다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이 해기교육을 받을 기회는 한일합병이 되어서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1919년 인천에서 설립된 ‘조선총독부 체신성 고등해원양성소’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인천 시절에는 ‘인천고등해원양성소’라 불리었고, 나중에 진해로 이전했을 때는 ‘진해고등해원양성소’라 불렀다. 물론 이 교육기관은 조선인에게 해기교육을 제공하기 위하여 설립한 학교는 아니었다. 소학교 고등과(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되는 소학교 졸업자들이 이수한 2년제 교육과정) 이상 학력 소유자가 입학할 수 있는 이 학교는 순전히 일본의 정치 사회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지어졌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해운은 호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해상운송을 담당할 많은 해기사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일본은 자국에 설립된 해기사 교육기관만으로는 수요에 감당할 수 없어 식민지 조선에 동일한 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학교는 우리가 일제가 통치한 식민지 조선에서의 학교 교육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엄혹한 이미지와 매우 일치하는 그런 학교였다. 이것은 선박 사관 교육과 맞물려서 당시의 교육기관으로서는 수학과정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힘이 들어 입학자 수에 비하여 졸업자 수가 많이 낮은 교육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일본이 조선인 해기사를 필요로 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1920년대 들어 한반도 북쪽으로 만주 지방, 중국 대륙, 그리고 아시아 전반으로 침략이 본격화되자 해상수송을 담당할 해기사가 턱없이 부족해진 것이다. 아시아를 향한 일본의 야욕은 끝이 없었다. 중국 대륙은 물론이고 남쪽으로 베트남, 태국,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더 나아가서는 폴리네시아의 뉴기니까지 점령했다. 그들의 정치 지리적 확장을 살펴보면 대항해시대 초기에 지구의 반대편까지 확장해 나간 포르투갈과 닮은 데가 있다. 다른 면이 있다면 한 쪽은 범선으로 수송을 담당했고 다른 한 쪽은 기계화된 금속 증기선으로였다.



일본의 한반도 식민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는 한일합병을 하고 나서, 나중에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해운업체가 될 ‘조선우선’이라는 기업이 설립되도록 막후작업을 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의 해운업을 주도하던 니혼유센(日本郵船)을 모델로 삼은 해운기업으로서 처음에는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해운업자들의 출자로 운영되다가 나중에는 일본 본국의 니혼유센과 같은 대주주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조선우선의 설립과 함께 거의 꺼져가던 조선인의 해운업은 그 남은 불씨마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처음에 한반도의 연안항로로 시작한 조선우선은 차츰차츰 한반도 주변의 근해 구역으로 활동범위를 넓혀 나갔다. 일본은 한반도와 연근해 구역은 조선우선에게 맡기고 나머지 원양구역은 본국의 대형 해운선사인 니혼유센과 오사카쇼센(大板商船)이 주로 담당하는 해운정책을 펼쳤다. 일본이 동아시아 해상권은 물론 세계 항로까지 해운 ? 해양력을 장악하는 데에 조선은 둘도 없는 속국 파트너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해양 경략에 있어서 식민지 조선의 인재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인이 해기를 습득하는 일을 매우 싫어했다. 보통선원으로 조선인을 고용했지만 그들이 기술을 습득하고 공부를 하여 해기사가 될 수 있는 조건인 해기면허증을 취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이 경우 하위 면허인 을종 해기면허가 아닌 상위 면허인 갑종 해기면허를 의미한다). 당시 조선우선에 근무하던 선장, 기관장이 대략 50여 명씩 있었지만 나중에 선장이 된 신순성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이었다. 해기에 대한 이와 같은 조선인 배제는 1919년 인천에 총독부 소속 ‘고등해원양성소’가 설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해운행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해운 행정기관의 육상직원에 조선인 직원을 거의 두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이 패전하고 물러난 뒤 아직 국호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던 신생조국의 해운행정은 무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실정이었다.



1919년에 설립된 해기 교육기관 ‘조선총독부 체신성 고등해원양성소’는 인천에서 신입생을 받아들여 해기교육을 시작했다. 당시 해기사 양성기관이 인천에 설립되었던 것은 인천 쪽이 해운물동량이 많고 경성이 가까운 것도 그 이유라 짐작된다. 학교는 교육활동이 매우 엄혹했기 때문에 신입생의 상당수가 자퇴를 했다. 그것은 망망한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을 책임지는 ‘사관 교육’에다 전시에 해군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군사훈련까지 받아야 하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과정 때문이었다. 일제는 이와 같은 선박 사관교육과 해군 예비사관으로서의 군사교육 체계를 근대화의 초기부터 구축했다. 그 결과 해운계 교육기관을 졸업하고 승선 취업한 해기사들은 평화 시에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 사업인 해운을 수행하고, 전시에는 동시 징발된 일반 상선에 수송 요원으로 징용되어 피격의 위험 속에서도 맡은 책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전쟁은 이웃나라를 불행에 빠뜨린 침략전쟁이었고, 일제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한 1930년대 후반에는 해군 예비원령의 법적용에 따라 징용된 조선 청년들도 참전하여 어쩔 수 없이 희생을 당하였다.



진해고등해원양성소는 초기에는 소수의 신입생을 모집했는데 대다수 일본인이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세계적인 해운호황 추세와 일본의 아시아 전역으로의 확장, 침략에 따른 물자 수송의 필요에 의해 부족한 해기 인력의 보충을 위하여 조선인 입학생을 늘여나갔다. 학교의 교육과정은 현재 세계적으로 채택되고 있는 각 국의 해기교육기관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지금도 다루고 있는 항해사를 위한 항해술, 선박운용술, 화물적화, 해사법규와 기관사를 위한 주기관, 열기관, 보조기계, 등은 학문적으로 선박운항 메커니즘의 근간을 이룬다. 그들은 주 전공 교과 외에도 천문학, 구면수학, 물리, 화학, 그리고 영어와 인문학 사회학을 공부했고 일제통치에서 강행된 황국신민 의식화 교육도 교실에서 이루어졌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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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욱 2018-10-05 11:31:33
뜻 깊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초대 해운국장을 지내신 황 부길 선생님, 해상 실무를 지휘하신 이 재송 선생님 같은 피 점령민의 설움을 딛고 독립 후의 독립조국의 바다에 헌신하신 위대한 분들이 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것 같습니다,
해양 위인들의 도전적인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