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측통행’과 ‘횡단보도’
‘우측통행’과 ‘횡단보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9.3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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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에게 길을 묻다.> 이 말은 ‘2016 한글문화예술제’의 주제어였다. 그 해 울산시가 이 행사를 마련하면서 내세운 구호는 ‘한글문화 중심도시 울산’이었다. 또 그 무렵 선보인 홍보문구는 참여욕구에 불을 지피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외솔과 한글’이라는 주제의 TV 특별대담과 한글 특별강연은 한글의 체계를 세우고 우리말을 가꾼 외솔의 한글사랑 정신을 되새기는 시간이 될 것이다.”

태풍 ‘차바’로 3주나 뒤늦게 열린 이 해의 한글잔치는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의 탄생 122돌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과 매력을 널리 알린다’는 취지를 그런 대로 살린 덕에 내용이 알차고 푸짐했다는 평가도 얻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상점가의 한글간판이나 길거리의 한글조형물 말고 남은 게 뭐가 있나 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글이 목숨”이란 글씨를 남긴 외솔의 뜻이 실현된 게 과연 몇이나 되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외솔의 한글사랑 정신을 우리말, 우리글 속에서 찾아내기란 백사장에서 동전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느낌이다. ‘한글문화 중심도시’를 귀 따갑게 강조한 울산시도, ‘외솔 장사’(?)로 짭짤한 재미를 보아온 중구도, 아이들 교육을 책임진 교육당국도 지적 대상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지 싶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들 행정기관·교육기관 계단에서 비교적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글자가 있다. ‘우측통행’이다. 친절하게, 괄호 안에 ‘右側通行’이라고 한자로 적거나 ‘Keep to the right!’라고 영어까지 달아놓은 곳도 있다.

한 번은 어느 학교 교장선생님에게 부탁말씀을 드렸다. 아이들 교육에도 도움을 줄 겸 ‘우측통행’을 알기 쉬운 우리말, 다시 말해 ‘오른쪽 걷기’나 오른쪽(으로) 다니기’란 글로 바꾸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사족도 같이 달았다. 그러나 반년, 일 년이 지나도 이 학교의 <우측통행/’Keep to the right!>은 여전히 처음 그대로다. 어떤 기관·단체이든 그 수장(首長)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혁신(革新)은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한다’는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는 결론을 그래서 얻게 된다.

‘한글문화 중심도시 울산’에서 꼭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너무나 오래 귀에 익은 ‘횡단보도(橫斷步道)’란 한자말을 순우리말 ‘건널목’으로 바꾸어 불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 낱말을 찾다 보면 어떤 사전들은 ‘유의어’라고 안내한다.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이희승 감수-길철환 발행 ‘엣센스 국어사전’(민중서림. 2001.1.10 제5판 제1쇄)에는 ‘건널목’을 “강·길·내 따위에서 건너다니게 된 일정한 곳”, ‘횡단보도’를 “안전표지에 따라 보행자가 그곳을 지나 차도를 횡단하도록 정해져 있는 도로의 부분”이라고 풀이한다. 17년 전 구식 풀이이겠거니 하고 그냥 지나치기로 하자.

하지만 또 다른 사전들을 훑어보면 두 낱말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유의어’가 아니라 ‘동의어’로 보아도 틀리지 않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순우리말 ‘건널목’은 발음하기도 어려운 한자말 ‘횡단보도’의 기세에 눌려 숨도 못 쉬는 모양새다. 지자체나 교육당국이나 경찰관서에서 사리진 지 이미 오래라는 얘기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고 말았을까?

탁 까놓고 말하면, ‘한글문화 중심도시 울산’이 장식용 구호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여러 기관의 수장들이 우리 한글에 깊은 지식이 없거나, 그래서 애정이 별로 없거나, 아니면 선거용에만 관심이 있거나, 한글을 아녀자나 쓰는 ‘언문(諺文=옛날, 한글을 속되게 이르던 말)’쯤으로 여기던 사대부(士大夫) 의식, 권위주의 의식에서 못 벗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외솔 탄생 124돌을 앞두고 하도 답답해서 “이것만이라도” 하는 생각에 모처럼 넋두리삼아 한 번 해본 쓴 소리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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