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를 ‘술술’ 먹다
국수를 ‘술술’ 먹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9.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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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리’로 만들면 ‘국시’, ‘밀가루’로 만들면 ‘국수’라 한다. 오래된 아재개그다. 기성세대에게는 그야말로 주식과 같은 간편한 음식이 됐고 늘 화젯거리의 대상이 된 메뉴다.

울산에서 조금 벗어나 두동, 봉계를 지나 경주 남산 가까이에 이르면 ‘우리밀 국수집’이 보인다. 20여년 된 나의 단골집이다. 울산에서 강의가 일찍 끝날 때면 가끔 찾는 국수집이다. 지금 가보면 옛날과 사뭇 다르다. 창업자 할매는 보이지 않고 다 큰 아들이 카운터에 앉아있다.

이 국수집은 우리들의 할매가 만드는 옛날식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면을 뽑는 좀 특이한 가게다. 손님이 구경하는 툇마루에서 면을 뽑아낸다. 툇마루에서 홍두깨로 반죽덩이를 밀어 널따란 칼국수 원단을 만든다. 그런 후 들러붙지 않게 밀가루를 뿌리고 하얀 종이에 둘둘 말아 절단의 수작업을 기다린다. 냉큼 식객이 주문하면 손칼을 대고 정성껏 썰어 삶는 단계로 넘긴다. 꼬랑지는 누가 먹는지 궁금하다.

완성된 우리밀 손칼국수 한 그릇. 거기에는 18가지 유기농 원재료가 들어가 있다니 감탄할 수밖에 없다. 외견상으로는 약간 촉촉한 느낌이 들지만 일단 입에 들어가면 쫄깃한 면발에 국물까지 씹히는 구수한 미각이다. 두드러진 한국의 예술적 맛을 음미할 수 있어 너무 기분 좋다.

대전역 구내에 가보면, 아직도 ‘총알 가락국수’를 팔고 있다. 그 옛날 경부, 호남선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 모두들 즐겨먹었던 그 국수가 아닌가! 역에 도착하자말자 재빨리 내려 2, 3분 만에 먹어치우는 소위 총알 국수집이다.

가판대 크기야 보잘 것 없지만 가락국수만은 최대한 빨리 내놓는 요술 같은 집이다. 반찬은 기껏 단무지 하나. 마실 물도 주지 않는다. 국수국물이 바로 물이다. 지금은 신역사 구내 1층에 커다란 추억의 집으로 관광 상품화하고 있다. 옛날 정취를 그런대로 느낄 수 있지만 그 때 그 국수 맛은 아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지하철 강남역 근방에 제법 큰 자장면 집이 있었다. 6, 70년대 맹활약했던 미남 유명 영화배우가 하던 중화요리집. 이 가게에서 팔았던 자장면은 다른 곳과 달리 특이하게 ‘감자’가 들어가 있다. 한 그릇에 반 토막만한 굵직한 감자 서너 개와 굵게 썬 돼지고기가 들어가 특유한 맛을 보탠다. 나는 여태 먹어본 것 중에 이렇게 황홀한 자장면의 풍미를 맛본 적이 없다. 다시 먹고 싶은 자장면이지만 앞으로 먹을 수 있을지? 요리 기법에 따라 이렇게 맛이 천차만별이니 무엇이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경북 구미 출생 여류시인 박정남의 ‘시’ 한편이 가슴에 와 닿는다.

‘국수’를 주문하는데/ 전원이 다 ‘미지근한 국수’가 좋다고 해/ 미지근을 시켜놓고 보니/ 이 모임 참, 미지근해서 오래간다 싶다/ 생각하니 다다음달이 벌써 10주년이 되는 달이다/ 미지근이 미덕이 되었으니/ 이젠 이름 하나쯤 가져도 좋겠다는 제안에/ 누군가 미지근으로 하자고 하여/ (중략) / 이름 하나 얻는 데도 장장 10년이 흘렀으니/ 그 뿌리도 참, 미지근하게 깊다…〔‘미지근에 대하여’ 박정남〕

그 시인의 모임, 참 미지근하다. 시골 장터에 가면 여기저기 미지근한 국수를 판다. 미리 담아 놓아 식어서 미지근하다. 젓가락으로 입에 넣으면 ‘술술’ 넘어간다. 미지근하여 빨리 먹을 수 있어 좋다. 값도 국수 중에서 제일 싸 부담도 없다. 이건 질리지도 않는다. 사람과 1대1 관계나 모임 구성원들끼리도 이렇게 미지근하게 만나는 데가 더러 있을까? 내 가까이엔 10년이 아니라, 미지근하게 40년이나 된 모임도 있다. ‘미지근 국수’같이 오래 지속되어 정말 행복해 보인다.

김원호 울산대 인문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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