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영 칼럼] 안전에 ‘사이다 처방’이 없다
[전재영 칼럼] 안전에 ‘사이다 처방’이 없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9.19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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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서울지역 아파트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정부에서 온갖 규제안을 내놨지만 백약이 무효인 듯하다. 그러자 모 유력 일간지의 한 논설위원은 ‘바보야, 문제는 매물이야!’라고 직설화법까지 동원해가며 대안 마련을 촉구하기에 이른다. 그의 주장은 단순 명확하다. 집을 팔기 쉽게 해야 집값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내놓는 대책이란 게 집을 못 팔게 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 오히려 매물이 안 나와 집값이 더 오른다는 논리다. 참으로 사이다 같은 글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 울산 석유화학단지에 매설되어 있는 한 스팀배관이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다. 한밤중의 사고여서 인명피해가 없었기에 다행이지 출퇴근 시간이었으면 생각하기도 두려운 사고였다. 사고 이후 지역 일간지들이 앞 다투어 이 사고에 대해 포화를 퍼붓고 있다. 그중 흥미를 끄는 헤드라인이 ‘노후 지하배관은 화약고, 통합파이프랙 구축 시급’이다. 지하배관을 모두 지상의 파이프랙 위로 끌어올리면 지하배관 문제가 사라져 버린다. 앞서 언급한 부동산 처방보다도 훨씬 후련한 핵사이다 같은 처방이 아닌가.

그러나 모든 일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이면이란 게 존재한다. 정부의 날고 긴다는 엘리트들이 사이다 처방을 모를 리 없고, 울산의 지하배관 전문가들이 파이프랙 건설의 필요성을 모를 리 없다. 울산지역 지하배관의 이면을 들여다보자.

1960년대 초부터 지하배관이 건설되어 지금은 공도에만 1천700여 km의 지하배관이 존재하고 관련업체 수만도 230여 개에 이른다. 배관이 밀집된 지역은 왕복 4~6차로 도로에 많게는 7~80개의 배관이 매설된 곳도 있다. 아무데나 조금만 파도 배관이 나올 정도이다. 이런 상태이기 때문에 파이프랙 건설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이번에는 기존의 지하배관을 들여다보자. 과연 화약고일까? 지하배관에서 가장 빈발하는 사고의 원인은 타공사, 부식, 자연재해 등이 있다. 타공사는 이미 지리정보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어 최근에는 발생빈도가 크게 줄었다. 대부분의 배관들이 전기방식을 취하고 있어 부식에 의한 사고도 크게 준 상태이다. 최근의 지진과 태풍 때도, 지하배관이 직접 피해를 보았다는 뉴스는 들은 바 없다.

이렇게 관리가 잘 되고 있는데도, 이번 스팀배관 사고처럼, 해마다 몇 건의 크고 작은 사고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아직도 완벽하게 관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도면과 배관의 위치가 100% 일치하지 않고, 전기방식도 회사별로 제각기 하다 보니 배관 사이에 간섭에 의한 전기부식이 발생하게 된다. 지하배관 사고는 바로 이런 이유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런 걸 보면 100%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고, 그렇다고 화약고 수준은 아니다.

이번 스팀배관 폭발사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아직 조사 중이기 때문에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으나, 한 가지 이상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변의 다른 배관이 원인을 제공했을 수도 있고, 지난여름의 기록적인 폭염이 일부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관리소홀로 민·형사 책임을 물리는 것보다 원인 조사와 재발방지 대책이 선행되어야 한다.

2000년에 미국 뉴멕시코 주의 사막 한복판 캠핑장에서 폭발사고로 6명이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미국 교통성 산하 여러 기관이 수개월에 걸쳐 원인을 조사한 결과, 주변을 지나는 장거리 가스배관이 부식되어 흘러나온 가스가 캠핑장의 점화원과 만나 폭발로 이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사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진단기술까지 수립해서 2002년부터 전체 가스배관에 적용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도 이 기술에 준해 가스배관을 관리하고 있다.

화약고라고 위기감만 부추길 것이 아니고, 시민들이 안심할 수 있게 제대로 된 대책이 나와야 한다. 파이프랙이 좋은 대안이기는 한데, 기존에 설치된 지하배관을 모두 파이프랙으로 올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향후 신설되는 배관을 지상화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현재로선 기존의 지하배관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관건이다. 배관이 매설된 지 오래됐다고 모두 노후화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구미 선진국에서는 관리를 잘하여 100년 넘게 사용하는 배관이 허다하다. 2014년 뉴욕 맨해튼에서 폭발사고로 건물이 붕괴된 사고의 원인은 가스 누출에 의한 폭발이었다. 이 건물에 사용된 배관 중 일부는 무려 130년 전에 설치된 것이었다.

울산지역 지하배관도 100년 이상 안전하게 쓸 수 있다. 우선 지하배관의 상태를 정밀하게 진단해서 배관의 위치가 GIS 도면과 일치하는지, 부식의 우려는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는 지점은 보완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건전한 상태가 지속될 수 있게 여러 센서를 설치해서 상태를 실시간으로 감시해야 한다. 다행히도 울산시와 산업단지공단에서는 이를 수행하기 위해 배관통합관리센터 설립을 추진 중이다.

안전엔 사이다 처방이 있을 수 없다.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치료만이 존재한다.

코렐테크놀로지(주)대표이사,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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