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1호기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上)
월성1호기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上)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9.18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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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란 것이 있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스러웠으면 그런 말이 다 나왔겠는가. 때가 늦었지만 차마 놓지 못하는 비통한 심정을 우회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날은 그런 심정으로 눈 감고 귀 막은 채 목 놓아 실컷 울고 싶었다. 35살이란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이다. 중병이 아니라서 처방전대로 이곳저곳 손을 보아 힘차게 롱런할 채비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2018년 6월 15일 한수원 임시이사회에서 그만이 월성1호기 폐쇄를 결정하고 말았다. 바로 3년 전에는 안전성·경제성 면에서 탁월하다며 계속운전을 허가했던 장본인들이 느닷없이 ‘비경제적’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 하나로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다.

오죽 못났으면 매스컴에서도 ‘도둑이사회’란 별명까지 다 붙였겠는가. 난데없이 깡패들이 몰려와 보물창고를 다 털어 가면서 쪽박까지 깨버린 형국이었다.

태어난 우물물에 침은 뱉지 말라고 했다. 언젠가는 다시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뒤돌아보자. 네가 태어난 해에 내 나이 35살이었으니 고약한 인연이 엮어지고 있었네, 지금 계산해보니….

처음 만남은 발전부 발전1과장(선임 과장이라 부른다) 때였고 잔병치레를 참 많이도 했었지, 우리는 밤낮 교대로 너를 돌보느라 노심초사했단다. 씨(국적)가 캐나다(Canada)여서 그런지 이곳 코리아에서 적응을 하지 못해 딸꾹질이 잦았고 심하면 까무러칠 때도 있었지, 그때는 온 발전소가 초비상에 들어가 그놈의 원인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고, 혹시나 간호 잘못은 아닐까 오금저린 날이 부지기수였다.

시운전이 본격화될 무렵인 1982년, 그 해 2월 28일자로 교대근무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인 공무과장과 함께 설비관리부서인 기계과장 자리로 옮겼다. 당시만 해도 사회 풍조가 외제(일제·미제·캐나다제…)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정해 주던 때였다.

그러나, 세밀한 분석해 들어가면 허점투성이였고, 엔지니어링의 기본 ABC도 놓친 경우가 허다했다. 준공 전에 사고를 많이 접해 봐야 진짜 실력이 는다는 속설 내지는 위로의 말이 그대로 맞았던가 보다.

세월이 흘러 1983년 4월 22일은 꿈에도 그리던 발전소 준공이 이뤄진 날로 말하자면 ‘상업운전’이 개시되던 날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호적에 출생신고를 한 날이랄까.

그때부터는 한 치의 오류나 정지도 허용되지 않고 공식적인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운전 상태는 안정을 유지했다. 가끔 아찔한 사고도 없지는 않았지만 ‘양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下편으로 이어짐

박재준 전 월성원자력 근무 에이원공업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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