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8)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8)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9.18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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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에게 매우 불리한 해운계약의 보상으로 일본으로 해기유학 길을 떠나게 된 신순성. 그의 해양활동은 훗날 근현대 한국 해운 해기의 외로운 표상으로 남으면서 고대 오랜 세월 동아시아 해상활동을 주도한 우리 민족이 다시 일어설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었다.
◁ 조선에게 매우 불리한 해운계약의 보상으로 일본으로 해기유학 길을 떠나게 된 신순성. 그의 해양활동은 훗날 근현대 한국 해운 해기의 외로운 표상으로 남으면서 고대 오랜 세월 동아시아 해상활동을 주도한 우리 민족이 다시 일어설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었다.

 

외세의 요구로 문을 연 조선 말에 문명개화에 대한 관심은 관이나 민이나 간에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커져 갔다. 조선 조정은 처음에는 쇄국의 자물쇠를 여전히 놓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개화파든 수구파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문명개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으며 그 방법론의 차이에 따라 다른 정치노선을 걸어갔다. 민도 처음에는 전통적인 유교 문화의 가치와 충돌하는 새로운 문명과의 만남에 놀라움과 혼돈에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차츰차츰 문명개화의 새로운 인간상과 세계 질서에 눈이 떠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외교관들이 조선 조정을 들락거렸으며 개항이 되고 그들의 조계지가 형성되었으며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들의 군대가 조선 땅에 주둔하는 일이 생겨났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경장, 러일전쟁 이러한 굵직굵직한 정치사가 있었는데, 국내외적으로 일어난 이 모든 변란과 전쟁에 조선 민생들의 희생이 뒤따랐고 사회적으로는 근대 문명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화 되면서 전체적으로 규모는 커졌지만 국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근대화의 초기에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해운 분야에서도 어떻게든 해 보려는 노력이 있었다. 당시 민에서는 연안 운송에 있어서 종래의 한선으로는 조선에 진출한 일본 해운업체의 기선을 따라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기선을 도입하는 획기적인 시도가 있었다. 인천과 마포 간에 여객과 화물을 실어 나른 삼산회사와 부산항의 우체기선회사와 협동기선회사, 인천항에 설립된 의신회사, 그리고 비교적 규모가 큰 해운선사로는 대한협동우선이 예전에 정부가 소유하던 5척의 노후선을 불하받아 국내 연안항로와 중국과 일본 등의 외국 항로에까지 배선하여 운항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조선 경제사회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해운마저 손에 넣은 일본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그들은 가장 최신식 선박을 가졌고, 해운경영과 선박관리의 노하우를 가졌으며, 선박을 운항하는 우수한 해기인력이 있었다. 게다가 병자수호조규라는 불평등한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 조선에서 운항하는 그들의 해운기업에는 재정적 지원까지 해 주었으니 그들과의 경쟁이란 애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조선인들의 해운업체는 문을 닫았다. 그들은 스스로 폐업하거나 선박의 운항권을 일본 해운업체에게 넘겼다. 낡은 기선 몇 척만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 해운기업과 경쟁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민족자본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해운경영 선박관리의 경험도 없었으니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조선인 승무 인력, 그 중에서도 고급 해기인력인 해기사의 양성과 현직 취업 활동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선원인력 고용의 특성을 고려할 때, 문호를 개방하고 조선 수역에 취항을 시작한 그들의 선박이든 조선의 관영해운과 민영해운이든 간에 그러한 개항장에서는 조선인을 특별한 해기기술 없이도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최하급 선원으로 고용했을 터이고 그들 중에서 해기를 익혀 보통선원에서 항해사 기관사 같은 해기사로 승진하여 나중에는 선장 기관장 직을 담당한 사람도 있었을 텐데 그것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구한말에 우경선, 김성진 등이 선장으로 활동했다지만 그 성장 경로와 활동 내용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구한말 해기의 계승과 인력 양성을 말할 때 최초의 군함 양무호에서 실시된 선원양성이 거론되는데 이 또한 기록에는 남아 있지만 그 실체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해기’가 전승되지 못한 점은 확실히 아쉬운 일이다. 배를 부리는 기술, 그 중에서도 연안을 드나드는 뱃일은 종래의 기술로도 가능하지만 먼 바다를 오가는 일은 오직 문명화된 새로운 배를 부리는 기술인 해기로만 가능한 일인데, 또 그것은 비록 아직 초보단계이지만 한국 해운이 하려면 할 수 있는 시도였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일이 새로운 문명, 과학기술 문화에 대하여 민民이 어떻게 잘 수용하는가, 라는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해운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해기라는 특별한 기술을 가진 인력이 필요한데 그 활동 공간이 바다라는 점은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다. 바다를 항해하는 뱃일은 조선 오백년을 두고두고 가장 천대 시 한 직업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대대로 내려온 이와 같은 열악한 해양의식이 적극적인 선원양성과 해기교육에 불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나마 1895년에 조선 조정이 국비 유학생 한만원, 박종서, 신순성을 당시의 선진 해양교육기관인 도쿄고등상선학교(현재 국내 학제로 고졸 이상 학력자가 입학할 수 있었음. 3년 좌학, 3년 실습의 고등교육과정)에 파견한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당시 관독민영의 해운기업 이운사를 매우 불리한 계약조건으로 니혼유센에 넘기면서 요구 조건 중의 하나로 조선인 해기유학 파견을 내세웠다. 조선 조정은 이렇게라도 해서 선원 양성의 불모지에서 이루기 어려운 해기와 해운의 꿈을 시도해 보려고 노력했다.

1901년 12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셋 중 한만원과 박종서가 돌아왔다. 한만원은 귀국 후 일시 해운활동에 종사했을 뿐 그 뒤 소식은 알 길이 없다. 박종서는 귀국하여 무엇을 하였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보다 6개월 후에 돌아온 신순성은 조선의 해운기업인 대한협동우선에서 승선근무 활동을 했고, 회사가 정부로부터 수탁운항하던 현익호와 창룡호의 부함장이 되었고 정부가 해원양성소로 활용했다고 전해지는 양무호의 부함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물론 그가 승무한 모든 선박에서 그는 유일한 조선인 해기사였다. 일본 유학 시절, 수많은 어려움과 쇠잔해 가는 약소국의 설움을 견디며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신순성은 마침내 공식적으로 한국인 최초 갑종 해기면허 선장이 되었고, 이 모든 일들이 그에게는 청춘의 꿈이었다. 그는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조선 젊은이들에게 빛나는 상징이 되어 가고 있었다.

1910년 한일병합 당시 신순성은 항로표지선인 광제호의 2등항해사로 지위가 격하되어 승선하고 있었다. 항로표지란 입출항선과 연안을 항해하는 선박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설치된 등대와 부표浮標 등을 의미한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크고 작은 섬이 많은 남해안 서해안에는 많은 화물선이 많이 다니고 있었는데 물론 그러한 화물선은 대부분 일본 해운기업의 선박이었다. 항로표지선은 이들 항로표지의 상태를 순찰하고 외따로 떨어진 섬의 등대수에게 부식과 식수의 공급, 그들의 안전 건강 생활을 확인하는 일도 했다. 말하자면 항로표지선 광제호는 해운빈국 대한제국에게 해양행정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해양활동인 셈이었다.

한일병합 국치의 날, 광제호의 선미에서는 태극기가 내려지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하나 남은 해양의 상징은 이렇게 그 깃발을 내려야만 했다. 조선인 해기사 신순성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순간이었다. 신순성은 태극기를 고이 접어 선실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승선근무 동안 내내 소중하게 간직했다. 신순성은 언젠가는 회복할 바다의 꿈, 대양을 건너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6. 여명

일제강점기에 2등항해사로 격하되어 승선생활을 시작한 신순성은 10년이 지나서야 1등항해사로 진급할 수 있었다. 그 후 1930년에 신순성은 당시 한반도의 유일한 해운기업인 조선우선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선장이 된다. 부산항이 개항되고 문명개화, 외세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지 어언 50여 년 만에 해양국가의 상징이랄 수 있는 화물선의 선장이 된 것이다. 물론 그 해양국가는 조선이 아니었다.

구한말에 조선조정이 일본으로부터 1,056총톤, 주기관 2,438마력의 광제호를 구입했다는 것은 문명개화 식산흥업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광제호는 당시 외국인 브라운(Brown)이 총책을 맡았던 해관의 관세 수입으로 신조 발주하여 일본 가와사키 조선의 고베 조선소에서 건조,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그 운항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일본에 의해 유지되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배를 운항하는 선원 구성을 보면 핵심 요원인 해기사와 3부 직장(갑판부, 기관부, 사주부 보통선원들의 부서장)은 주로 일본인이었고, 3부 직장을 제외한 보통선원은 조선인이었다. 그러므로 해기사에 조선인이 한 명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들 일본인 해기사는 주로 현역 해군 장교들로서, 당시 일본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선박이 정치 외교적으로 입지가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말해준다. 배는 일본 조선소에서 인수되고 인천항에 도착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들 현역 해군 장교 해기사에 의해 운항되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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