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수의 ‘갯마을’ 그리고 ‘떡’
오영수의 ‘갯마을’ 그리고 ‘떡’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9.1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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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195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오영수’의 단편소설집 <갯마을>의 ‘복각판’(復刻版=원본을 그대로 본떠 다시 새긴 목판 인쇄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특히 이 복각판의 몇 가지 흥미로운 특색들은 ‘올드보이’들을 향수 속으로 빨아들이는 묘한 마력(魔力)이 있다.

마력은 이 복각판의 오른쪽 절반에 집중된다. 가로쓰기가 아닌 세로쓰기 편집, 바탕이 연분홍인 종이색깔, 군데군데 누렇게 스며든 물기 흔적들…하며, 어느 하나 예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고본(古本)임을 입증하는 증거들은 이 복각판의 끝자락(281쪽)에서도 발견된다. (편의상 한자는 한글로 바꿔 옮긴다). <값 500환/ 단기4290년 2월10일 인쇄·단기4290년 2월20일 재판발행/ 저자 오영수/ 발행 중앙문화사 (등록 336호)>

‘단기(檀紀) 4290년’이라면 ‘서기(西紀) 1957년’. 6·25 전쟁이 휴전협정(1953.7.27)으로 막을 내리고 오영수의 단편소설집 ‘갯마을’이 처음 발표(1953.12)된 지 4년 후 시점이다. 흥미의 압권은 전후(戰後)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끝부분 ‘우리의 맹세’. 어릴 때 수없이 보고 때론 외우기도 했던 ‘우리의 맹세’는 과거 음반의 ‘건전가요’ 같은 성격으로 전문은 이랬다. <1.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3.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며칠 후면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다시 악수를 나누지만 그때만 해도 남북통일의 수단은 오직 ‘승공(勝共)통일’ 하나뿐이었음을 짐작케 한다.’갯마을’의 복각판이 반가웠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떡보영감 박 노인’ 이야기의 바른 제목이 ‘떡’이라는 사실을, 이 복각판을 통해 실로 수십 년 만에,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 노인은 아랫방에서 미닫이를 조금 열어놓고 며느리 제수 장만하는 것을 내다보고 앉았다.>로 시작되는 이 단편의 제목은, 중학생 때 읽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탓에, 정확한 기억은 못하고 있었다.

‘떡’의 줄거리는 명절 때마다 내 정서의 뒤지게 만드는 감칠맛 나는 이야깃거리였다. <…며느리가 떡밥을 쪄내다 안반 위에 쏟자 그의 아들이 떡멧자루에 침을 뱉아 지극지극 우긴다. 며느리는 물에 손을 적셔 퍼져 나가는 변두리를 걷어들인다. 어지간히 어울리자 아들은 메를 둘러메고 내리친다. 떡은 메를 물고 잘 놓지 않는다. 며느리는 연신 물을 적셔 멧머리를 돌려준다.…>

“엣소, 굳기 전에 잡소!” 떡이라면 사족 못 쓰는 시아버지의 입맛을 모를 리 없건만 며느리는 이날도 제 서방 챙기기에만 바쁘다. 박 노인은 자신의 존재를 알린답시고 보란 듯 안방 문을 열어놓는다. 하지만 젊은 것들은 본 척도 안 한다. 바로 이때 장보러 나갔던 시어머니가 손자를 업고 들어온다. 아들 입에 묻은 떡고물을 훔쳐본 시어머니는 잽싸게 인절미를 만들어 대접에 담는다.

단편소설이 으레 그렇듯 ‘떡’의 압권은 후반부에 나타난다. 울산의 아들 오영수는 이렇게 묘사한다. <평발을 고쳐 도사리고 재떨이에다 담뱃대를 기세 있게 딱딱 떤다.…박 노인은 부지중 으험! 하고 헛기침이 나왔다. 할만이가 떡대접을 들고 오자 박 노인은 그만 미닫이를 와락 열어젖히고 뛰어나오면서 ‘내 이 년놈들 나도 할만이 있다!’ 이렇게 호통을 하고는 떡대접을 받아들고 아들 내외를 향해 마치 삿대질이나 하듯 ‘봐라 이 년놈들아, 나도 할만이…>

‘나도 할만이 있다’란 표현 속의 ‘할만이’를 대학생 때까지도 ‘할 말이’의 오기(誤記) 정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할멈’의 경상도사투리’- ‘할망이’ 또는 ‘할망구’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또 수십 년이 지나서였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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