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9.06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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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광장을 쓴 최인훈 작가가 돌아가셨다. 같은 날 정치인 노회찬은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며칠 후 유월의 아버지라는 글로 아들 박종철의 이야기를 절절하게 풀어놨던 박정기 씨도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연이은 궂긴 소식에 그저 황망할 마음이 들 무렵 황현산 평론가도 이승을 떠났다.

물론 이들과 나는 일면식이 없다. 다만 문학판과 세상살이의 선배들이다. 그럼에도 꽤 가까운 친지라도 잃은 듯 안타깝다. 그들 모두가 시대를 관통하면서 누구보다 시간의 칼춤을 견뎌야 했고, 세상을 벼리는 글과 말과 행동을 길잡이 삼아 삶을 이어갔기 때문이리라.

최인훈 작가의 죽음을 접하며 처음 글쓰기를 배울 때가 떠올랐다. 젊은 시절, 하나의 화두를 잡은 이래 끝까지 놓지 않고 탐닉하던 최인훈 작가의 노력, 즉 평생 동안 『광장』 고쳐 쓰기를 실천한 작가의 노고가 새삼 존경스럽다. 고쳐 쓰기가 새로 쓰는 것보다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아는 까닭에 더 그렇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공언하던 정치인 노회찬의 죽음도 곱씹을수록 아프다. 여러모로 대체 불가인 그였는데 황망한 투신 소식을 전해 듣고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그의 시대정신은 무엇인지, 자꾸만 목숨을 요구하는 이 시대가 정녕 슬펐다. 한 많은 삶을 마감한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씨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아들을 목 놓아 부르짖는 그의 목소리가 이제 아들을 부둥켜안는 기쁨의 몸짓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또한, 세심하고 정갈한 글쓰기를 계속할 평론가 황현산의 저 세상 속 부활을 꿈꾼다. 이제 그들은 영원한 침묵으로 들어갔다.

영원한 침묵 속으로 간 그들과는 달리 또 다른 침묵의 작가가 생각난다. 바로 조세희 작가이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은 작가에게 기자는 왜 침묵하느냐 물었다. “나는 쓰는 일을 안 한 것이 아니라 쓰지 않는 일을 한 것이다.” “언어가 시대를 바꿔 뜻을 배반할 때 언어의 변신과 대결하며 침묵하는 것. 쓰지 않는 것은 내게 건 싸움이었다. 글이 무력한 시대에 처음부터 쓰이지 않는 것이 글의 복일 수도 있다.” 작가의 침묵에 이만큼 치열하고 명징한 답이 또 있을까?

스무 살 적부터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친구와 가끔 통화한다. 친구가 내게 요즘엔 무슨 글을 쓰냐고 물었다. 요즘 다른 일 때문에 통 못 썼다고 답하는 내게 친구가 말했다. “쓰지 않는 동안에도 계속 생각해야 하는 것 아냐? 그러는 게 작가 아니니?” 나는 친구의 현문에 우답으로 답했다. “그러다 작가, 과로사 한다.” 둘 다 싱겁게 웃고 말았지만 씁쓸한 마음이 올라왔다.

요즘 사실 글을 많이 쓰지 못했다. 조세희 작가처럼 명확한 침묵의 까닭을 갖고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저 먹고 사는 일로 바빴기 때문이다. 한동안 건조하고 기계적인 작업을 배우다 보니 소설의 얼개를 짜고 인물을 생각하는 시간을 내지 못했다. 현실 속 상황에서 벌어지는 여러 인간 군상의 행태를 실컷 속으로 관찰할 기회는 많았다. 틈틈이 소설 생각을 했지만 구체적으로 작업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도 친구도 새로운 글을 썼냐고 물어오는 통에 조바심은 더해갔다. 작가로 살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시대를 관통한 이들이 잇달아 저문 여름, 짧은 글 한 편을 마무리했다. 삶의 극단을 넘은 그들이 아직 사는 도중인 내게 준 선물처럼 짜릿하다.

산다는 것은 뭘까? 너무 거창한 화두, 아무도 정확한 답을 내지 못하는, 혹은 수많은 답이 존재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저 숨 쉬는 생물학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게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들숨과 날숨의 틈새에 거하는 것은 아닐는지. 최인훈 작가처럼 고쳐 쓰는 일, 노회찬처럼 삶의 지표를 잡고 행동하는 일, 박정기처럼 고단하지만, 묵묵히 아버지의 삶을 이어가는 일, 황현산처럼 생의 끝자락까지 정신을 갈고 닦는 일 모두가 산다는 것의 다른 뜻일 터. 들숨으로 시작한 삶에서 날숨이 다하는 죽음이 올 때까지 조세희 작가의 침묵을 되새기며 살아가리라. 다만 소설가로 살리라.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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