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6)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6)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9.04 21:4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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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증기선이 붐비던 인천항.
일본 증기선이 붐비던 인천항.

 

이 때 일본본토에서도 제한적이나마 교역을 진행했는데 나가사키 데지마 섬에 설치된 네덜란드 상관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당시 유럽이 자본주의적 에너지와 함께 발달된 기술문명으로 생산해 낸 적지 않은 과학 기술 물품들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기압계, 온도계, 레이덴 병, 비중계, 암상 카메라, 환등기, 선글라스, 메가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일본인들의 눈에는 진귀하게 보였을 물품들이 일본사회에 소개되었고 자연히 그들의 문화생활에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동남아시아 아열대권역에서 일본의 해양활동은 비교적 일찍부터 진행되었다. 14세기에 이미 일본의 상선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여기에서 교역을 했고, 16세기 이후에는 비교적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당시 그곳에 진출한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해양열국의 무장한 상선들의 전투에 용병으로 참여한 일본 사무라이들의 활동이 있었음이 전해지고 있다. 근대 이전부터 동남아시아 해항권에서 교역에 참여한 일본의 해운활동과 거기서 축적된 자본은 훗날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에 있어서 경제적 에너지가 되었다.



중세 말 또는 근대 초에 있었던 일본의 해양활동이 근대국가 형성에 자본주의적 에너지가 되었다면 일본 근대국가의 사상적 기초는 주로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서구와의 교역에 따른 문화교류에서 나왔다.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는 데지마 섬에 입항하던 네덜란드 상선은 당시 한창 자본주의적 에너지로 달궈지고 있던 유럽사회가 생산해 낸 지금 수준에 비하면 매우 초보적이긴 하지만 당시로 보아서는 신기하고 진귀한 물품들을 쏟아냈다. 이러한 수입품들이 일본 사회의 소비 시장에 소개되었음은 물론이다. 서로 다른 문화권끼리의 교역은 문화이동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일본에 소개되는 서구의 물품 중에는 서적도 있었다.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서적 중에는 의학서적들도 있었는데 외과 수술을 위한 인체해부도 그림책이 당시 시대의 흐름에 깨어 있는 일본 외과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기들이 믿고 있던 중국에서 전래된 인체해부도에 오류가 많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네덜란드가 전해주는 서구의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학서적 외에도 그들이 전해주는 각종 과학문명 기술에 대한 서적을 받아들이면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전부 네덜란드어로 쓰여 있으니 번역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지만.



서구유럽이 자본주의를 발달시켜나간 과정에는 동남아시아 열대 지역의 풍부한 산물의 유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이런 나라의 무장을 한 상선들은 인도네시아, 버마, 태국, 필리핀 등지에서 교역을 하면서 또는 현지의 식민 지배를 위하여 서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상생을 도모하는 등 복잡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한 때 네덜란드의 해상세력이 우위를 점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수도 암스테르담에는 열대 동남아에서 건너온 수많은 산물들이 소개되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또 새로운 물품이 나올 정도로 너무나 많은 물품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자 물질 또는 물질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가 있기 시작했다. 유럽이 갖는 세계관과 인식론은 흔들렸다. 당대의 철학가 데카르트가 남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철학명제는 이와 같은 사회적 기류와 관련이 있다. 훗날 유럽에 박물학이란 학문이 생기고, 박물관이 설립되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과 일치한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의 결과물이 일본에 전해졌다는 데에 우리들의 아픔이 있다.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유럽의 학문을 연구하는 ‘난학’은 당시 네덜란드 상인이 전해 준 각종 서적을 번역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들 난학 연구자들은 생의 전부를 바치다시피 오직 번역작업에 매달렸다. 생전 처음 보는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문장을 번역하는 일은 난제 중의 난제였다. 중화권이 사용하는 한자 용례의 규범을 벗어나 새로운 한자어를 만들어야 하는 일도 그들 난제 중의 하나였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문화, 예술, 교양, 이런 말들은 다 그 때 생겨난 단어들이다. 난학자들의 연구 활동은 차츰차츰 번역 수준에서 벗어나 서구의 과학문명과 물질문명이 갖는 사상, 또는 이념과 궤도를 같이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이것은 훗날 일본이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에 성공하고 식민제국주의의 근대국가로 나아갈 때 정치이념과 외교철학의 근원적 에너지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우리에게는 실학이라는 서구가 추구하는 실용적 가치관과 일치하는 학문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도 못한 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위대한 저작물이 그들 저자 개인의 것으로만인 채 남겨지고 말았으니 서글픈 일이었다. 이웃한 두 나라에서 비슷한 세대에 진행된 학문, 또는 학문운동이었지만 그 결과는 천양지차로 격변하는 양육강식의 국제관계에서 한 쪽은 점령국, 다른 한 쪽은 그들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근대에 증기 금속선의 함선을 갖춘 서구가 일본에게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하라고 압박한 것은 1853년에 미국의 페리함대가 에도만 입구에 왔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1876년에 부산항, 원산항이 일본에 의해서 강제 개항되었고, 그 후 본격적으로 외국 선박들이 우리의 바다를 드나들었다. 양쪽 다 외세의 거센 물결은 바다를 통해서였다. 그렇지만 반응은 달랐다. 한 쪽은 쇄국, 다른 한 쪽은 개국이었다. 운명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던 결코 한눈 팔 수 없는 혼돈스럽고 위험한 국제정세가 예고되고 있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너무나 오랫동안 잠을 자고 있었다.


5. 바다부터 잃다
그들은 대양을 건너왔다. 그들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으면서 섬과 산봉우리 같은 육지의 항해물표의 방위를 관측하며 항해하는 안전한 ‘연안항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나침반과 하늘의 천체를 관측하여 선위船位를 구하고 하늘이 흐려 별을 볼 수 없을 때는 대략적인 추측위치에 의존하며 항진하는 대양항법으로 그들로 보면 세상의 끝인 이곳까지 왔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한 쪽은 선린善隣이 지고한 덕인 군자의 땅이고, 다른 쪽은 언제라도 전쟁을 불사하며 확장만이 미덕인 식민 제국주의 국가이니 말이다. 여기에 숟가락을 얹은 나라는 일본이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일찍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에 성공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근대화를 시도하고 과학문명 기술을 받아들여 소위 말하는 식산흥업, 부국강병의 길로 나섰다.



그러므로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바다에 아주 태연스럽게 굴뚝에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떠 있는 금속 증기선의 실체를 해안가 주민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물론 관아의 관리들과 중앙의 조정에서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온 세상의 바다를 휘저어 다니면서 세상의 땅을 두드려 대는 저 배의 정체를 바깥 바다로는 나간 적이 없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저 배는 세상을 온통 휘저으며 다니는 이양선이었다. 바다에 떠 있는 저 배들이 지금에사 저렇게 연기를 내뿜으며 흰 포말로 해면을 가멸차게 달리는 증기기관선이지만 그 전에는 범선 즉, 돛단배였다. 대항해시대에 그들은 단순히 노를 젓고 바람에 돛을 달아 나아가면서 세계의 항로를 구석구석까지 찾아나갔다. 선박을 부리는 기술인 해기海技가 과학기술 문명을 갖지 못하고 아직 자연 상태인 범선의 수준에 머물면서 세계의 모든 항로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해안가 주민들의 놀라움은 멀리 멀리 퍼져 나갔고 뒤숭숭한 소문들이 나돌기도 했다. 바다로부터 외세는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몰고 온 선박은 한반도의 전통적인 한선과는 많이 달랐다. 나무를 주재료로 하여 배를 짓고, 돛대에 돛을 달고 풍향 풍력에 맞춰 용총줄이며 아딧줄을 줄이고 늘이며 흥겹게 뱃노래도 불러가면서 나아가는 방식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의 배는 바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의 배는 필요에 따라 쉽게 방향을 돌릴 수도 있었다. 그것은 속도도 빨랐고 선체도 컸다. 언제라도 항해할 수 있고 빨리 도착하면서도 많은 양의 짐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출입항하는 도선기술, 부두를 들고 나는 이안 접안 작업, 대양의 풍랑을 극복하는 감항능력, 선체의 강도, 보침력의 확보, 추진력의 생산, 기상의 예측, 선위의 계산, 방향의 정확성, 이 모든 문제들을 공학으로 해결해 내었다. 사람의 감각기관과 감성에 의존하는 종래의 해기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물론 더 이상 뱃노래의 응얼거림도 필요하지 않았다. 종래의 우리 연안의 바다를 들고나는 이치와 지혜 같은 것은 없어도 좋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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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현 2018-09-07 00:08:26
항해사라는 길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오태규 2018-09-05 11:36:15
기존 항해사들의 감각기관과 감성을 이용하여 했던 항해술은 공학의 발전으로 디지털화 되어 보다 정확하고 신속,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여기에 더욱 발전이 되어 4차산업혁명으로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 여러 신기술들로 인하여 발전하게 된다고 합니다.

예전 무인운항이 더이상 먼 미래가 아니겠죠..ㅎㅎ
발전사를 통하여 앞으로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역사를 배우는 한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매번 잘 보고 있습니다.
다음 호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