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5)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5)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8.28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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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분의. 대양항해에 있어서 선박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육분의로 천체의 고도를 관측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이와 같은 항해용 도구가 없었다.
육분의. 대양항해에 있어서 선박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육분의로 천체의 고도를 관측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이와 같은 항해용 도구가 없었다.

 

유럽에 의해 명명된 대항해시대란 이름에는 이 위대한 도전으로 인하여 세계 문명 문화의 발전과 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과 수탈이라는 모순된 자기 역사에 대한 긍정, 또는 미화 의식이 숨어 있다. 그들의 대항해가 진행되어간 수많은 중계지 해항권에서 사람들은 거의 강제적으로 불평등하게 교역을 해야 했고 현지의 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사탕수수와 면화 대농장이 운영되었으며 비참한 노예무역이 있었다. 그와 함께 발달된 과학문명이 유입되면서 식생활 개선과 의복생활 주거시설의 개선, 식량의 대량생산, 교통통신 문화의 혁신, 우수한 위생 의료기술, 인쇄술과 언론의 발달로 사람들은 삶의 질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문명인의 자격에 합당한 인권의식과 민주시민 의식에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대항해시대의 대항해는 인간의 의지가 자연의 악조건을 극복한 사례란 측면에서 볼 때 그 자체로서 위대한 과업수행이었지만, 그 결과에 대한 가치 평가는 얼마든지 이처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대항해시대란 이름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대발견 시대’ 또는 ‘대확장 시대’라 부르는 등, 논란이 있지만 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바다에서는 당시의 기술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열악한 조건에서 항해가 진행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장되어 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대항해’라는 수식어는 합당하다 하겠다.

그렇다. 확실히 수많은 항해요원들과 선척이 바다에 가라앉았다. 중세말 대항해의 시작이라고 평해지는 포르투갈의 대양으로의 진출은 일단은 남쪽의 아프리카로 향한 남대서양의 바다였다. 물론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포르투갈은 그 전에 이미 북해의 해항권으로 해상교역을 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 해상무역의 주도권은 강력한 해양 도시국가였던 베니스와 제노바에서 포르투갈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 시대에 리스본은 유럽 중심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고, 해변의 거리에는 선용품 가게와 해도제작소가 흥업했다. 침몰되는 배에서 헤엄쳐 나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콜럼버스가 리스본에서 선원으로서의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다. 북해로 해상무역에 열중하던 포르투갈은 언제부턴가 남방의 바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땅의 무어인과 전쟁을 치르던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온 전리품 중에 그들의 관심을 끌었던 물품이 꽤 있었던 것 같다. 포르투갈은 리스본 앞바다의 카나리아 군도 남방으로 교역선을 띄우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전 지구적인 대항해를 꿈꿨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선대가 처음으로 적도를 통과하고 아프리카 남단에 닿아서 거기서 인도양을 건너 인도에 도착하고, 다시 동쪽으로 인도네시아로, 거기서 다시 필리핀으로 북상하여 중국 동안과 일본 열도에 가 닿기까지 수많은 선척을 띄웠고 곳곳마다 상업거점지대를 형성하고 상관을 세웠다. 대체 그들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희생을 감수하면서 바다로 나아갔을까? 해양과 함께 국가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것이 의문스러운 이유는 당시 이 작은 나라의 인구가 1백만 정도밖에 안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당시 그들은 얼마 안 되는 인구의 30%가 바다로 또는 바다 너머 그들의 상업거점지대에 나가 있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대항해를 꿈꾸고 실행에 옮긴 것은 엔리케였다. 그는 포르투갈 교역선의 선장과 항해요원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미지의 땅으로 가게 했다. 그는 한 번도 항해에 종사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훗날 역사가들은 그를 항해왕이라 부른다. 왕자로서 유력한 왕위계승자이지만 왕위에는 관심이 없는 그는 오직 해양을 꿈꾸면서 포르투갈의 대항해를 주도해 나갔다. 말로만 듣던 전설 속의 바다, 두렵기만 하던 마의 바다들이 속속 통과되었다. 보하도르 곶, 블랑코 곶을 돌파하고 오늘날 노예해안이라 일컫는 기니 만에 가 닿았다. 그동안 배는 해안가 마을에 들러 교역을 했고 가죽이 값비싼 물개도 상당수 사냥했다. 먼 바다에 나가면 폭포에 떨어진다든지 외눈박이 거인이 배를 삼킨다는 등 전설들이 미신임을 알게 되었다. 적도 지방에 가면 백인이 흑인으로 변한다는 말도 낭설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차츰차츰 용기를 얻게 되었다. 항해가 위험하고 희생자가 속출했지만 사람들은 바다로 나아갔다. 견고하지 못한 선체구조, 아직 주먹구구식의 항해술, 빈곤한 식생활과 거주조건, 광대무변한 자연환경의 악조건 속에서도 교역을 위한 항해는 계속되었다. 엔리케와 대항해의 선장들은 조국의 해양을 꿈꿨지만, 일반선원과 민간인 투자자 대개는 교역의 결과에 따르는 이윤을 꿈꿨다. 항해에 성공하고 돌아오면 가난뱅이는 부자의 기회를 갖고 몰락된 귀족은 다시 신분회복의 조건을 가질 수 있었다.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배는 새로운 땅 새로운 바다의 지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해도가 수정되고 새로 그려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바닷길이 열렸고-,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이 새로운 땅 아프리카는 남쪽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해안마을에 닿아 교역을 하고 포르투갈 땅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며 항해와 교역 중간 기지를 설치하기도 했다. 여전히 선대는 파견되었고, 돌아왔고, 다시 파견되고……. 본국으로부터 거리가 많이 길어지자 항해 중간 기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는 아직 대양항법이 발달되지 않아 항해자들은 주로 연안항법으로만, 그래서 해안에서 멀어져 땅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에 떨어야 하는 그런 시대였다. 그들은 자꾸만 남쪽으로 남쪽으로 항진했고 아프리카 남쪽의 땅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삶의 근원인 고국으로부터 멀어지는 일,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찾고 있었다. 인도에 가서 향료를 싣고 오기만 하면 고가로 거래되는 유럽 시장의 향신료를 장악하기만 하면 포르투갈은 부국, 부국강병을 이룰 터였다. 드디어 땅이 끝나고 동쪽으로 바다가 펼쳐졌다. 아직 지구의 제대로 된 모습도 알려지지 않은 거의 무지에 가까운 당시의 지리적 식견, 열악한 항해술을 생각한다면 포르투갈 선대의 희망봉 발견은 기적 중에서도 기적이었다.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안의 거대한 섬 마다스카르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의 선대는 여기서 수많은 상선들이 와서 교역을 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동쪽으로 대양을 건너면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인도가 있고, 여기에 그곳에서 온 상선들이 있으며 당연히 그곳으로 가는 항로에 정통한 수로안내인도 있다는 것이다. 그 후 선대는 인도의 캘리컷에 가 닿았으며, 향료를 적재한 배는 다시 서쪽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희망봉을 지나 아프리카 서안을 연안항해하여 리스본에 도착했다. 포르투갈 궁정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당시 유럽 전체가 인도라는 동방을 향한 열망과 함께 바닷길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었는데 그 과업을 포르투갈이 해 냈기 때문이다. 인도로 가는 뱃길이 열린 후에 진행된 포르투갈의 해양확장은 참으로 경이적이다. 그들은 남쪽으로 아프리카 서안의 항해 교역 기지들에서 시작하여 희망봉, 마다스카르, 아프리카 동안, 아라비아 반도, 인도 남부,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그리고 대만을 거쳐 중국 동안으로 북상하였고, 드디어는 당시 서구 유럽에는 그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극동 아시아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일에 당시의 최첨단 전쟁무기인 대포를 앞세웠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세에 유럽이 동양보다 앞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쟁무기였다.

대항해를 하며 동쪽으로 끝없는 항해를 계속하던 포르투갈 선대가 만난 새로운 땅은 말로만 듣던 전설 같은 땅 ‘지팡구’, 오늘날의 일본이었다. 포르투갈 표류 상선이 해양지리적으로 일본열도가 남쪽으로 가로놓여 조선에 흘러들어오지 않은 것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먼 바다를 건너온 이 푸른 눈의 상인들을 접견한 당시의 일본의 통치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양열강이 바다를 건너 대확장을 꾀하고 있고 아시아 해역권의 적지 않은 부분이 그들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있는 세계정세를 읽고 평소의 야망인 대륙 침략에 뜻을 굳힌다. 그들은 조총을 건네주었고, 일본은 그것으로 전투력을 배가시켰다.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의 실권을 잡은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는 히데요시 때부터 구상되어온 동남아시아에서의 일본의 무역 정책인 ‘주인선 무역’을 실시했다. 그것은 일본 막부의 직인을 찍은 허가서를 지닌 상선만이 일본을 출입하며 무역할 수 있다는 일종의 해운증명서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동남아시아에서 현지인들과는 물론 이곳에 진출한 포르투갈 네덜란드 상인들과도 교역을 하며 자본을 축적해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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