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필정치(代筆政治) 시대
대필정치(代筆政治) 시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8.26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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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성명, 귀에 확 들어오던데.” “동감이야. 비유도 참 근사하고.” 예전에 가끔씩 들던 대화의 줄거리다. 화제의 중심에는 으레 OO당 시당 대변인의 이름이 들어갔다. 그러나 듣고 놀라지 마시라. 제 이름 석 자 올려놓은 대변인치고 성명서를 제 실력으로 작성할 줄 아는 이가 가물에 콩 나듯 한다는 사실을….

알고 보면 성명서는 대개 별도의 인물이 대필(代筆)해 준다. 필력(筆力) 하나 ‘끝내주는’ 숙련된 문장사(文章士)가 따로 있다는 얘기다. 이들은 누에고치에서 비단실을 뽑듯 수려한 문장을 곧잘 뽑아낸다. 속는 것은 일반시민이나 정치고객들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처지도 못 된다. 알고 속고 모르고 속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대필 작업은 지방자치단체나 지방의회의 수장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는다. 적어도 열에 아홉 그 이상은 ‘스피치라이터(Speech-writer)’라는 문장사를 ‘5분대기조’처럼 대기시킨다. 공식 행사에서 낭독의례(?)를 거치게 되는 대회사나 축사, 격려사는 대부분 문장사의 고민을 거쳐 나온 회심작들이다. 그렇다고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지체 높은 화자(話者=Speaker)일수록 1분1초가 바쁘신 몸일 터이고, 축산가 뭔가 하는 그 하나 때문에 책상머리맡에서 머리를 싸매는 시간 그 자체가 아깝기 그지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 수장일수록 문장사 의존도는 한없이 높아진다. 자연히 ‘영혼이 실종된’ 미사여구(美辭麗句)의 나열에 그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이런 관행에 익숙해지다 보면 독자나 청중들은 허상(虛像)만 쫓다가 지쳐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수장들이 다 그런 거라고 일반화할 계제는 못 된다. 문장력(文章力), 필력으로 따져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김기현 직전 울산시장이나 송철호 현 울산시장 같은 분들은 예외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문장사가 밤잠 설쳐가며 작성해서 올린 ‘말씀 꾸러미’를, 입맛에 안 맞아서 혹은 모양새가 안 좋을 것 같아서, 거들떠보지 않을 개연성도 없지 않다. (실제로 ‘원고도 안 보고’ 스피치를 이어 간 사례가 몇 차례 목격된 바 있다.)

이처럼 대필은 정치계에서 흔한 일상처럼 굳어져만 간다. 아무도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겠다’고 감히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런 풍토 속에서 지역 정가에서 대필 작업이 진화(?)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느 기초의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 했다. 전언(傳言)에 따르면 기초의원 A씨는 최근 평소와 사뭇 격(格)이 다른 세련된 문장과 예리한 관점의 질문으로 동료 의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격조 높은’ 문장은 5분 자유발언, 구정질문, 심지어는 상임위원회의 조례안 심사 과정에서도 위력을 과시했다.

이 과정을 죽 지켜보고 호기심이 발동한 동료 의원 몇몇이 우스개삼아 물었다. A의원도 스스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체질에 맞지 않았다’는 점을 시인했다. ‘윗선’의 하명(下命)이 있었다는 사실도 털어놨다. 5분 자유발언도 구정질문도 조례안 심사 발언도 대부분 ‘윗선에서 보내준’ 대로 읽었으며, 그 짓이 싫어서 일부 대목은 ‘자신의 스타일’로 바꾸기까지 했다는 얘기였다.

A의원은 그래도 ‘윗선’에 대해서만은 끝까지 함구했다. ‘의리 하나 끝내 준다’는 뼈 있는 농담에 뒤이어 구구한 억측이 꼬리를 물었다. 어느 수장을 보필하는 문장사의 작품일지 모른다는 설(說), 당협(=당원협의회) 차원의 작전지시에 따라 모 유력인사의 보좌진의 손길을 거쳤을지 모른다는 설 등등…. 전언의 진위(眞僞 여부를 당장 알 길은 없다. 여하튼 이 같은 대필정치(代筆政治)가 지역 정치계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어쨌거나 가치판단은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좋을 성싶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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