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의 행복, 수직의 행복-‘목격자’
수평의 행복, 수직의 행복-‘목격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8.23 19: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란 게 있다. 서로를 이어주는 그 끈을 다른 말로는 ‘정(情)’이라고도 한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그 끈은 제법 선명했었다. 그때는 그랬거든. 아파트란 게 귀해 ‘동네’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던 그 시절엔 음식을 많이 하면, 아니 일부러 음식을 많이 해서 윗집, 아랫집, 옆집끼리 서로 나눠먹었다.

버스를 타면 앉은 사람은 너나할 것 없이 서 있는 사람의 가방을 들어주려 말을 건넸고, 어느 집에서 부부싸움이 벌어지면 동네 전체가 시끄러웠다. 밤늦은 시각이라도 이웃 주민들이 찾아와 싸움을 말리지는 못해도 걱정이 돼서 한번쯤 들여다보려하곤 했었다. 또 그 때 동네 아이들은 여름이면 밤늦도록 전봇대에서 다방구(술래잡기)를 하거나 비석치기, 구슬치기 등을 하며 함께 놀았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그런 분위기는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었던 건 버스 안의 풍경.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앉은 사람은 서 있는 사람의 가방을 들어주려했지만 그런 모습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던 거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버스 안에서 서 있는 사람의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말을 붙이기가 왠지 쑥스럽고 어색해져 갔다. 별 다른 이유도 없었다. 그냥 그랬다. 공교롭게도 그 시절 우리 집도 막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됐다.

아파트로 오니 제일 좋은 점은 역시나 집 안에 화장실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 때는 셋방살이하는 사람들은 화장실도 바깥에서 공동으로 썼다. 시쳇말로 ‘푸세식 화장실’이었는데 추운 겨울밤에 신호가 올 때는 거의 죽음이었다.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또 하나 크게 달라진 건 우리 집 현관문이 무지 두꺼워졌다는 점이다. 재질도 바뀌었다. 강철 대문으로. 그 전까지 우리 집은 유리가 낀 얇은 목재나 철재 미닫이였다. 아무튼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새로 생긴 강철 대문은 무더운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닫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늘 닫혀 있는 그 강철 대문이 참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이웃 간에 더 이상 음식을 나눠먹지 않는 것도, 버스 안에서 서 있는 사람의 가방을 들어주려 하지 않는 것도, 심지어 옆집에서 부부싸움이 크게 나도 모른 채 하는 것도 어쩌면 그 강철대문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내 말은 80년대 후반까지 존재했던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줬던 그 보이지 않는 끈이 강철 대문이 닫히면서 잘려나가 버린 게 아닐까라는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즘은 사실 옆집에서 살인사건이 나도 모른 척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조규장 감독의 <목격자>는 바로 그런 세태를 다루고 있다.

새벽 시간 서울의 한 대단위 아파트 단지 한 복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연쇄살인마의 추격을 받다가 그 아파트까지 오게 됐고, 그녀는 죽기 직전 “살려달라”고 아파트가 떠나갈 듯이 외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몇몇 목격자가 있었지만 다들 자기 일이 아니라서 모른 채했다. 목격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주인공 상훈(이성민)은 그래도 베란다에서 112로 전화를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연쇄살인마와 눈이 마주쳤고, 보복이 두려워 못 본 척하고 만다.

사실 <목격자>에서 상훈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연쇄살인마에게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노출된 만큼 누구든 처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때문에 영화는 상훈보다는 아파트 주민들 전체로 시선을 돌린다. 살인사건이 터지자 그들은 입주민대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단체로 서명까지 해가며 경찰의 수사 협조 요청을 거부한다. 아파트값 떨어질 까봐.

생각해 보면 80년대까지 내가 누렸던 이웃 간의 정(情)이란 것도 결국은 행복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수평의 행복’같은 것. 하지만 지금은 그 행복은 많이 사라지고 높이 솟은 아파트처럼 ‘수직의 행복’만 자라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끊어져버린 그 끈이 아쉬운 건 우리 인간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좀 더 줄어들었다는 데 있지 않을까.

몇 해 전에 본 영화 중에 <인투 더 와일드>라는 작품이 있다. 거기서 주인공 크리스토퍼(에밀 허쉬)는 인생의 즐거움이 인간관계에서 온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 믿으며 오지에서 혼자 생활하다 다쳐 쓸쓸하게 죽어가게 된다. 죽으면서 그는 이런 글귀를 남긴다. “행복은 나눌 때 진정 가치가 있다.”

2018년 8월 15일 러닝타임 111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